[가정예배]11월25~30일

[가정예배]11월25~3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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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2일(금) 15:25

월-그러다가 큰 코 다친다
본문 : 마 13 : 29-30
찬송가 : 535장
 
오늘 본문 말씀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다.
 
'가라지'는 팔레스틴 지방에 서식하는 식물인데, 보리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일명 '독보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보리밭에 기생해서 함께 자라도 이삭이 필 때까지는 거의 구분이 안 되고, 추수 때가 되어서만 구분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천국이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교회까지,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그런데 그 독성이 있는 잡초 '가라지'를 주인이 바로 뽑지 않는다. 뽑다가 곡식까지 상하기 때문이다. 추수 때에 가서,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고, 가리지는 뽑아 불살라 버린다.
 
그런데, 새로운 발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본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고,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가라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이지만, 나에게 가라지 같은 요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가라지인데도, 나에게 사실 가라지 요소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곡식하고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곡식인줄 착각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단히 좋은 신앙인인줄 알고 착각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손보지 않는다. 그래서 내 신상에 아무 일 없이 평안한다. 그러니 내가 꽤 좋은 신앙인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무섭고, 가장 안타까운 것이, '내가 가라지인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나에게 '가라지적 요소가 많은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내가 '형편없는 신앙인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내가 '곡식인줄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내가 '대단히 신앙 좋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손보지 않는 것은, 첫째는, '다른 곡식 다칠까봐'이고, 둘째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볼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계속 뻣뻣하게 가라지로 살면, 나중에 추수 때 큰 화를 당한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 큰 코 다치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 있을 때, 더 이상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말고, 회개하고 주님을 내 중심에 모셔야 한다. 나의 가라지적 요소를 끌어안고,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죄 사함 받아 흰 옷 입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오늘의 기도>
내가 가라지일 수 있음을 인정하며 회개하오니 용서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언구 목사/용문교회


화-은총에 넘치는 감사
본문 : 골 3:15-17
찬송가 : 393장
 
어떤 소년이 예배당에 들어와 제단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 더하기 표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이의 어머니는 "저 더하기 표인 십자가는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덧셈표가 된단다"라고 답해주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고통과 질병과 실패와 좌절과 비극과 폐허 속에서 헤매게 될 때 이 교회에 나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삶의 더하기 표시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에 있다. 우리는 모두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가난에서 경제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무지에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 질병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병원에 찾아가 고침을 받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궁극적인 구원을 얻도록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의 좌절과 실망과 죄악과 죽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거룩한 제단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
 
내게 주신 생명, 건강, 가정, 자녀들, 시간, 능력, 사랑, 경건한 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삼중의 장애로 고통의 삶을 살았던 인생, 헬런 켈러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게서 눈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나는 밀턴의 실낙원을 기억한다. 그는 내게서 귀를 빼앗아 갔다. 그러나 내게 베토벤이 다가와 있다. 그는 내게서 혀를 빼앗아 갔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내 영혼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영혼을 소유했으니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삼중의 장애를 가진 자의 일생, 헬런 켈러의 감사는 내 영혼이 구원 받은 것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했다.
 
거룩한 성전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인간이야말로 숭고한 인간이요, 아름다운 인간이요, 인간의 본문을 다하는 성도인 것을 알아야 한다.
 
구원받은 일에 대해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 그가 믿음 있는 사람이요, 감사의 의미와 맛을 아는 사람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
 
감사를 회복하는 신앙이 되어야 참 신앙임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주여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알고 바른 감사 큰 믿음의 감사자가 되도록 깨달음과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종준 목사/동암교회


수-골고다의 사람들
본문 : 눅 23:33-43
찬송가 : 507장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읽는 우리도 그 장면을 머리에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해골이라 불리는 처형장에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고 양 옆으로 다른 죄수 한 명씩 매단 십자가가 세워졌다. 무리들과 지도자들과 병정들이 둘러서서 조롱한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이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상세하게 들은 것 같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 너나 구원해보라"며 놀려댔다. 심지어 같이 매달린 강도까지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했다. 이들이 외치는 "자기나 구원하여라"는 말은 공의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뜻을 삿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공의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님의 삶은 공의를 회복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오늘 한국교회 또한 공의를 말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공의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성서에 나타나는 구원사건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총이었다. 우리 모두를 향하여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복음을 우리는 성서에서 보지 못한단 말인가? 공의의 하나님을 사사로운 사적구원의 우상으로 바꿔버린 우리가 아닌가?
 
그러나 성서본문에서 이렇게 조롱하는 자리에 한 사람은 다른 말을 한다. 바로 다른 한 강도였다. 그는 "이 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롱하는 다른 한 강도를 향해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꾸짖는다. 그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성서를 읽는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 예수님을 향한 이 사람의 심정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 처형의 이 순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이다. 다만 죄 없는 사람이 안타깝고 가엾고 미안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죄한 사람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위로하는 사람, 힘이 없어서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계시는 자리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이다. 그리스도인이 종말적으로 산다는 말은 항상 깨어 있어서 자기가 선 자리와 발걸음을 성찰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적인 삶을 위해 공의를 버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자를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돌아보자. 약한 사람,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하며 이들과 함께 하자. 우리가 이들과 함께 할 때 주님은 또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지금도 여전히 힘든 자들을 이제는 우리가 주님처럼 돌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금교 목사/누가교회


목-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본문 : 민 12:1-16
찬송가 : 342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모세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모세가 이방여인 구스 여자를 취한 일로 인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잘못된 일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며 충고한 것이 아니라 비방하고 대적하려고 했다. 모세를 무너뜨리려 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비난한 실제 이유는 2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만 특별한 권위를 갖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자신들도 모세와 똑같은 위치의 지도자로 인정 받고 싶었다.
 
미리암과 아론의 반역 사건을 통해 우리는 3가지 교훈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했지만, 이 일은 하나님을 비난한 것과 같은 잘못이라는 사실이다. 미리암은 이스라엘 여성을 대표할 만한 여선지자였고, 아론은 백성의 어른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대제사장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크고 귀한 권위가 있었다. 하지만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자로 삼으신 데서 나온 권위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조력자요 동역자로 세우신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난하면서 그의 권위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너희들에게는 내가 환상과 꿈으로 내 뜻을 알게 하였지만 내 종 모세에게는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였고 나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너희들이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모세에 대한 비방을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셨고, 모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심판하신다.
 
미리암과 아론의 두 번째 잘못은 모세를 뒤에서 비방했다는 사실이다. 성서학자들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뒤에서 행한 잘못이 민수기 16장 고라 자손의 반역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리암과 아론의 반역은 당사자들의 지도력에도 손상을 주었고,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 무엇보다 미리암과 아론의 반역 사건은 모세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모세는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아픈 마음을 치유 받아야 할 때였다. 그런데 형과 누나가 모세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혼자 책임을 다할 때는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모든 일이 다 수습되고 어려운 일이 지나자 이들은 모세와 동등한 지도자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의 자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권리도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겸손함과 낮아짐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곽철희 목사/청안교회


금-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본문: 눅 21:1-4
찬송가: 50장
 
옥한흠 목사의 책 '길'에 '목사 기죽이는 사람들'이란 글이 있다. 사랑의교회 장로 가운데 두 사람이 선교사로 떠난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50대 중반이 넘었는데, 후반기 인생을 선교지에 가서 일하고 싶다며 1년 동안 선교 전문 기관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퇴직금만 갖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인생후반기를 자원하여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교수직은 주방도 없는 방을 하나 내어주는 조건이 전부였다. 그런 조건을 듣고 장로님은 "목사님, 거기 가서 연단 좀 받아야죠"라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에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야말로 인격으로나 헌신으로나 목사 기죽이기 딱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당신 같은 사람들을 목사로 부르시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부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뿔에 기름을 채워 그것을 갖고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갔다.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본 사무엘은 그의 외모를 보고 감동했다. 과연 하나님이 기름 부으실 자를 예비해 두셨구나! 그래서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전 1:28)."
 
주님은 많은 헌금보다 진심으로 드리는 헌금을 칭찬하셨다.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액수는 두 렙돈이다. 렙돈은 액수가 가장 적은 동전이다. 하지만 주님은 과부를 칭찬하셨다. 액수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고 상급이 있다.
 
하나님은 최고보다 최선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헌금 액수뿐만 아니라 남겨놓은 액수도 지켜보신다. 부자가 칭찬을 받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드린 금액은 남겨둔 금액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다. 하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사람은 최고를 높이 본다. 1등만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를 높이신다. 사람이 언제 가장 아름답게 보일까? 최선을 다할 때 아름답게 보인다. 주님의 삶이 왜 아름다울까? 최선을 다해 불꽃처럼 사셨기 때문이다. 최고가 아니어도 좋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중심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을 드리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중심을, 최선을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한 목사/호산나교회


토-그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본문 : 눅 18:8
찬송가 : 287장
 
본문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런 비유를 드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목숨을 버리려고 다리난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이것을 본 사람들은 애가 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려고 힘 쓸 것이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목숨을 죽음에 방치해 두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오실 때를 말세라 할 수 있다. 말세에 교인들 중에서 참 믿음의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교인들은 많지만 참 믿음의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면 교인들 중에는 불신자가 많다는 말이다. 교인에게 믿음이 없는 것은 치명적이다. 자기 영혼을 죽음에 방치해 두고 있는 것과 꼭 같다.
 
믿음은 절대로 중요하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영혼이 영생에 들어갈 수도 있고 멸망에 들어 갈 수도 있다. 믿음이 없이 교회 다니는 것은 자기 목숨을 죽음에 방치해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믿음은 무엇일까? 성경은 믿음을 아주 단정적으로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살펴보면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아닌지 너희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니라"고 했다.
 
내게 참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내안에 계신 것을 내가 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라 하셨으니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다. 자기 목숨을 죽음에 방치해 두고 있는 것과 같다.
 
말세에 인자의 날에 왜 참 믿음을 찾기가 어려울까? 무엇이 문제일까?
 
본문을 보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때문이다. 세상이 곧 신이다.(고후4:4) 세상은 어둠의 권세가 장악하고 있다.(눅 22:53)
 
이러한대도 너무나 많은 교인들은 세상에 깊이 빠져 있다. 그 마음은 세상과 탐욕과 인간적인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영혼은 세상 잠을 자고 있다. 마음에 예수님은 없고 세상이 들어와 있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영혼이 영이신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여 새벽빛같이 내게 임하시옵소서. 땅을 적시는 늦은 비 같이 내게 임하시옵소서. 말세인 이때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화려하고 만족을 주는 세상의 것에 현혹되지 않게 하옵소서. 탐욕과 이기심으로 내 영을 채우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오실 그날 예수님께 부름받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한 목사/주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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