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은혜?

망각의 은혜?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3년 10월 11일(금) 11:21
소원(이준익, 드라마, 12세 2013)
 
앞서 소개한 '가시꽃'은 대체로 가해자의 처벌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성폭행 피해 여성의 고통과 그것의 깊이를 가시화하였다. 비단 아동성폭행을 다루고 있긴 해도 '소원' 역시 성폭행 피해자, 특히 가족과 이웃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일한 관심과 방향성을 가진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것은 아마도 그동안 우리가 피해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반성해보게 된다.
 
'소원'은 조두순 사건을 사례로 삼아 제작된 것이라, 그 동안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던 사건을 마치 실제로 보는 것 같아 충격적이었다. 자신과 무관한 사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이런 사회성을 띤 영화는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아동 성폭행을 남의 일처럼 보지 않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실제로 이준익 감독은 범죄 스릴러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처음부터 범인을 노출시킴으로써 아동 성폭행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과 이웃들까지도 쉽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에 천착하여 제작하였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를 통해 특히 공적 기관을 통해 범인의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폭로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공적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2차 3차의 피해들을 보여줌으로써 사회가 피해자를 어떻게 배려해야 할 것인지를 환기한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비록 사회적인 측면에서 한계와 좌절을 경험한다 해도, 피해자의 고통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들과 가족 그리고 이웃들이 공감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영화는 하나의 판타지 형태로 피해자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이웃의 밝은 미래를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바라던 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금 일상에 묻혀 살면서 망각을 통해 아픔이 치유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피해자 아이의 이름이 '소원'이고 또 태어나는 동생 역시 '소망'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이런 바람이 간절함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계속되는 일상과 망각이라는 현상으로 고통의 치유를 말하는 것은 사실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의 깊이를 너무 단순화 시킨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듯이, 현실만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다.
 
사실 불행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피해자 당사자와 주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결국에는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법이다. 영화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트라우마라 함은 재해를 당한 뒤에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심리적인 반응을 일컫는다. 피해자에게는 우울증은 물론이고 대인기피증과 과민반응 그리고 감정의 회피나 마비와 같은 증세로도 나타난다. 트라우마는 2차 3차의 피해를 불러오며 피해자의 삶은 물론이고 인격마저도 파괴할 수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영화는 피해자인 소원에게 나타나는 이런 증세로 가족 특히 아버지로서 겪는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이웃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불행한 일이라 쉽게 잊을 수는 없더라도, 더 이상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건강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과거 사건에 대한 충격이 쉽게 잊히진 않겠으나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만일 일상에 묻혀 살면서 또 거듭되는 새로운 사건들을 접하면서 고통과 아픔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소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고, 이준익 감독은 바로 이런 소원을 영화로 표현한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여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가능한 한 피해자와 가족이 불행한 기억을 속히 잊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또 그 가운데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뇌의 작용을 말하면서 망각을 말하고 또 거듭되는 일상에 묻혀 사는 인생을 말하면서 잊어버린다. 잊기 어렵고 또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들이 이렇게라도 해서 치유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영화는 성폭행 피해자를 대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긴 해도,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라 잊으려 하고 또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을 영화로나마 경험함으로써 부도덕한 욕망이 절제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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