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대한 욕망

이야기에 대한 욕망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3년 07월 18일(목) 10:34
인 더 하우스(프랑수아 오종,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2)
 
코펜하겐 미래학자이자 유럽 미래학회 자문위원인 롤프 옌센은 '드림 소사이어티'를 말한다. 이야기에 가치를 두고 이야기를 통해 소통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물론이고, 이제는 광고에까지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모든 것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고 또 모든 것에서 이야기를 읽어내고자 한다. 이야기 없는 삶은 건조하고, 이야기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소설 이야기는 영화로 거듭나고, 영화 이야기가 소설로 재구성된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소비되는 대상이고,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흐름과 관련해서, '이야기에 대한 소비욕구, 곧 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를 묻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생산된 이야기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회자한다. 소리로 들려지고, 문자로 읽혀지고, 영상으로 보여지고, 또 학문의 텍스트가 되기 때문에 머리로 생각된다. 때로는 실천을 위한 매개로서 행위로 재현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매체는 수요에 따라 교체되면서 또 다른 형태와 의미 그리고 색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는 끝을 모른다. 독일 작가 미카엘 엔데는 '끝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는데, 이야기의 속성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이야기에 끝이 없다면 당연히 이야기에 대한 욕망도 끝이 없다는 말이다. 도대체 그 끝을 묻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진정 무한한 것일까?
 
이야기는 상상의 세계다. 현실을 기록한 것이라도 이야기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보고라 해도 이미 이야기로 기록되는 한 더 이상 현실이라고 볼 수 없다. 이야기가 무한하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가 끝이 없다는 것이고,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세대를 거치면서, 지역과 문화를 달리해서 회자하면서 거듭나고 또 재생산되어 새로운 지평으로 확산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전적인 의미를 갖는 이야기가 태어난다.
 
영화 '인 더 하우스'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 곧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사는 사람, 아니 이야기를 위해 현실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사람의 욕망과 그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소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특한 연출을 통해서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어떠하며, 그 결말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제르망은 작가를 꿈꾸었지만 재능의 한계로 포기하고 지금은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사로 살고 있다. 아내 쟝은 갤러리를 운영하나 경영난으로 쫓겨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관심을 끌만한 작품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다. 어느 날 학생들의 작문 실력을 개탄하던 중에 제르망은 클로드의 에세이를 발견한다. 상상만 하던 부자 친구 라파의 집에 들어가는 과정을 쓴 글에서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제르망은 클로드의 문학적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개인레슨을 작정하고, 계속 글을 쓰도록 고무하고 또 돕는다. 창작에 있어서 현실 경험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클로드를 돕기 위해 심지어는 학교 시험지를 빼돌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명목상으로는 클로드의 재능을 키워주는 것이지만, 사실 그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할 정도이며, 학교에 오고 가는 일이 마치 클로드와의 만남을 위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클로드는 제르망이 지도하는 대로 그의 관심을 끌고 또 그의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친구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특히 친구의 엄마에 대해 품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마치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듯한 이야기 서술에 제르망과 아내는 점점 소설과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다.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친구의 가족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고 또한 클로드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된다. 친구의 엄마와 벌이는 부도덕한 애정 행각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제르망은 교사로서 자신이 더 이상 레슨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미 자기 엄마와의 애정 행각을 알고 있었던 라파는 시험지를 빼돌린 사건을 학교에 알리게 되고, 제르망은 교사직에서 해고된다. 클로드는 제르망의 권고대로 마지막 엔딩을 수정하면서 결국 무대를 라파의 집에서 제르망 선생의 집으로 옮긴다. 라파의 집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유부녀에 대한 연정을 선생님의 부인에게서 충족시킨다. 제르망이 보여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이처럼 파국으로 마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내용과 연출 때문이다. 흥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도덕과 윤리라는 제동장치 때문에 어느 순간 멈칫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내용으로 회자하는지를 보면 대답을 금방 알 수 있다. 살인과 폭력, 부도덕함과 비윤리 등. 도덕과 윤리는 어느 정도 제동의 효과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제동장치는 될 수 없다.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가 결탁하면서 이야기는 더 이상 도덕과 윤리로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제동장치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욕망은 별개의 문제다. 흥미있는 이야기를 좇는 인간의 욕망은 현실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며, 심지어는 인간을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이야기 이후의 세계를 구성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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