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호모 사케르와 교회

한국의 호모 사케르와 교회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3년 06월 21일(금) 16:36
마이 라띠마(유지태,드라마,청소년관람불가,2013)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 시대의 폭력적인 정치와 삶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라고 했다. 모든 법적인 보호가 박탈당한 인간,곧 벌거벗은 생명(인간)을 가리킨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고 그것으로 결코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마이 라띠마'는 그동안 배우로 활동했던 유지태가 감독으로서 연출한 첫 장편 데뷔작인데,프랑스의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다. '파이란'(송해성,2001)과 닮지는 않았으면서도 많이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호모 사케르의 한국적인 현실,곧 우리가 그렇게 자주 말하고 또 관심을 기울이자고 외쳤던 '작은 자'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회고발적인 영화다.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층에 속한 사람들이 나온다. 무엇보다 이주민 여성과 관련해서 뉴스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사건과 이야기가 영화로 재현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현실에 바탕을 둔 영화다.

태국의 가족을 위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이주해온 마이 라띠마(박지수)는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과 혼인관계를 갖지만,그녀를 데리고 온 목적은 무엇보다 일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처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을 한국에 데려오기 위해 얻은 빚만을 내세우며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한국 가족과의 마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체류허가를 연장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한다. 적지 않은 이주민 여성들이 어떠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당하는 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치다가 폭행당하는 그녀를 구해준 수영(배수빈) 역시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다. 서류상 한국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두 사람은 법적 보호로부터 벗어나 있어 온갖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태국어 '마이 라띠마'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고 한다. 제목과 영화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면,영화를 통해 감독이 갖고 있었던 질문을 대략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한국형 호모 사케르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두 호모 사케르의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좌절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두 사람이 서로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지를 보여준다.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 당할지 모르는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마이는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차별을 받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임신 중이다. 그들은 늘 쫓기는 처지이고,그들을 보는 시선들은 탐욕적이고 음흉하다. 그들에게 뻗친 손은 도움을 베푸는 제스처 같아 보이나 언제든지 그들을 이용하고 또 그들을 갖고 장난치려는 속셈을 품고 있다. 욕망의 먹이사슬에서 포식자일 뿐이다.

가정 폭력과 경찰의 단속을 피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를 의지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들을 즐기며 살아간다. 사실 빈집을 전전하며 종종 남의 것을 훔친 것으로 먹고 살아가는,그야말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책임지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누군가 하나는 배신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배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영화관을 가득 채운 어두운 기운이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감독은 그나마 마지막 장면에 다소간의 희망을 포석해 놓았다. 그런 환경에서 삶의 모습과 사람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살아 있는 한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이 질문에 침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감독은 관객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려면 관객으로서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 것만 같다.

영화는 두 개의 장면에서 기독교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이웃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기독교를 폄하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마이의 한국인 가족 중에 손윗동서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고,다른 하나는 노숙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장면이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마이에 대한 가정의 폭력을 막지 못하고,오직 교회 봉사만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모습은 차마 보기가 어려웠다. 기독교 신앙을 포장할 줄만 알았지 현실을 기독교적으로 대처해나가려는 의지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많은 한국교회의 모습을 비쳐준다. 노숙자들을 위해 제공하는 식사 봉사는 그야말로 허공을 치는 것 같다. 그들에게 한 끼 식사는 정말 소중한 것이나,그들이 단지 한 생명체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서 살아가도록 돕는 방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층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생명체로만 보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그 일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욱 복음적이다. 특히 그들을 위한 사회적인 기반이 약할수록 교회의 섬김은 더욱 의미가 있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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