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선교의 아픔과 상처

한인선교의 아픔과 상처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5월 10일(금) 14:54
한인선교와 현지인선교를 함께 한다고 하면 한인 사역의 힘과 역량으로 현지인 선교를 하기 때문에 쉽게 선교를 하지 않나 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주님의 은혜로 많은 사랑과 축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면의 선교를 위해 받는 이중적 고충 또한 많았음을 회고한다.
 
필자가 사역하는 과달라하라의 한인 사회는 교회가 없는 곳이었다. 남미의 자유 분방함이 넘쳐나는 곳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데로 자유롭게 생활하는데 익숙한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에 30대 후반의 젊은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세웠다. 교회 개척의 기쁨은 잠시였고 교회가 없던 곳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고 한인 사회의 첫 번째 기관이었기에 교회를 바라보는 관심과 기대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었다. 한인 영혼 구원을 위해 선교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오해, 핍박, 분열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지금도 현지인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어찌 다 지면에 옮길 수 있으랴.
 
낯선 곳에 와서 당하는 여러가지 일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아내는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다. 의사의 진단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어려서 앓았던 중이염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염증이 뇌에까지 퍼지고,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빨리 수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의료시설이나 의료체계 등을 활용하기에는 언어의 문제나 이곳 사람들의 업무처리 형태 등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은 가증됐다. 중이염 수술은 뇌와 연관된 곳이기에 무엇보다도 환자에게는 안정이 중요하므로 고국에서 수술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강한 항생제를 써서 일단 염증을 가라앉힌 다음 파송 후 3년 만에 중이염 수술을 위해 일시 귀국하게 됐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갈수 없어서 주변의 도움으로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약 2개월 정도의 치료를 마치고 선교지로 돌아와 보니 교인 몇 가정이 나가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어떻게 온 가족이 고국 방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유치원생이고 누구에게 맡길 처지도 못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누구나 언제든지 고국방문을 하는 여유들이 생겼다. 그러나 그 때에 자기들은 가족이 동시에 고국 방문을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로 교회가 하나 더 생기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흥이 되어서 많은 성도가 모였다. 그런데 새로온 교인들이 열심을 내면 그것이 시기와 질투가 되어서 교회를 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민 목회의 큰 갈등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에 큰 아픔은 안수집사 투표를 하면서 4명을 뽑기로 하고 투표용지에 4칸을 마련했다. 개표결과 4명의 안수집사가 피택되었다. 이 중 한 명이 "그 사람이 어떻게 안수집사가 될 수 있느냐? 투표용지를 4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하고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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