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자

욕망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자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3년 05월 09일(목) 16:41
노리개(최승호,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3)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여성연예인 인권침해 실태조사'(2010)에 따르면 여성연기자의 45.3%가 술시중을 들라는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었고, 60.2%는 방송 관계자나 사회 유력 인사에 대한 성 접대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수치는 한 여성 연예인의 자살을 계기로 실시된 조사 결과인데,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사실로 확인해주었다.
 
연예인 자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고 진실의 편에 서기를 포기하는 법정 소송 과정에 대한 의혹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노리개'는 소위 연예인 술시중과 성 접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어쩌면 그동안 개봉되어 많은 호응을 얻은 사회고발성 영화에 힘입어 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로 재현하는 것은 그동안 간과되고 있던 사실에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하고 또 그럼으로써 영화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사건에 대해 정서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인식의 변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 '실미도', '도가니', '부러진 화살', '26년', '두 개의 문', '레미제라블' 등이 그랬다.
 
영화적으로 아쉬운 점은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사실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 효과가 적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두 개의 문'처럼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허구라고 전제하고 시작한 영화였다면, 굳이 문제가 되었던 자살 사건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동안 인터뷰를 통해 확인된 술시중과 성 접대와 관련해서 좀 더 다양한 행태들을 드러내도 되었을 것이다. 허구라고 시작하고는 마지막 장면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단순한 허구로만 그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연의 폭이 너무 좁아 다양하고도 깊이 있게 생각할 여지를 얻을 수 없었다.
 
사실 사건의 핵심은 스타가 되려는 힘없는 자들의 욕망이 힘 있는 자들의 욕망의 먹이사슬에 놓여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욕망과 욕망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에서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 수밖에 없는 인권침해의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비단 여성 연예인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힘과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경쟁 사회에서 욕망이 작용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외연은 비록 이미 일어난 사건에 제한된다 해도 상징적인 장치를 통해 보다 넓은 내연을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힘 있는 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설령 그렇지 않아도 명예와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실속보다 이미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더욱 빈번하게 또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욕망을 따라 사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영화에서는 검사의 약점을 이용해서 소송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변호사의 계략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여성 검사의 당찬 소신을 반대 사례로 살펴볼 수 있다. 이로써 감독은 힘의 역학관계에서 굴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했다.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은 소위 '노예계약'으로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음에도 스타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한다. 힘의 역학관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부당한 일임을 알고 있지만 스타를 꿈꾸는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한, 욕망의 먹이사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은 비단 사회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담임목회자의 부당한 요구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부교역자의 신음소리, 교회성장과 부흥을 강요하는 당회와의 관계에서 교회론에 부합하지 않은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담임교역자들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다. 여기에는 교역자들의 부당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성도들의 원성도 포함된다.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비록 목회자라도 다른 사람의 헌신을 강요하고 남용한다. 자신의 비전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반복하여 말한다면, 문제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다.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며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은혜에 의지하며 살기 때문이다. 은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무리수를 쓰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또 설령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되는 것을 본다 해도 결코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거나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따라(갈5:16-17) 살라고 강조했고, 같은 의미에서 베드로서 기자는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벧전4:2) 살 것을 말했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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