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찾아 눈보라를 뚫으며- 이재인 권사(상)

말씀을 찾아 눈보라를 뚫으며- 이재인 권사(상)

[ 향유와 옥합 ]

강영길
2013년 05월 08일(수) 10:58
충청남도 예산에 위치한 봉림교회,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이재인 권사(78)를 만났다.
 
맨 먼저 교회를 설립한 분은 1대 교역자인 정난숙 권사였다. 그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접했는지 모르지만 교인도 없을 때에 이미 3대째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 그분이 이 동네에 강습소라고 아주 조그만, 다 찌그러진 초가를 예배당으로 이용하면서 봉림교회가 시작된다. 그 집에 방 두어 개를 한 칸으로 터서 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없는 날은 한글을 가르치는 학당 역할을 했다.
 
   

보은군 관기에서 태어난 이 권사가 이곳 봉림으로 시집을 오니 새벽이면 망치로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걷히는 시간에 새벽하늘을 가르고 엽서나 되는 것처럼 날아오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권사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교회에 나오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당최 전도하는 사람이 없다. 혼자서 그냥은 못 나가겠고 누가 좀 가자, 하기를 바라는데 가자는 사람이 없다. 그 즈음 하루는 주일학교 선생이라는 사람이 왔다.
 
"아주머니 혹시 교회 안 다니세요?"
 
얼마나 반가운지 이 권사는 옳다구나 싶어서 얼른 대답했다.
 
"아이고, 어찌 알았대유? 내가 교회 갈라구설라무니 마음을 먹고 있는데 암도 가자고 허는 사람이 없시유. 그래서 못 가고 있었구만유."
 
그렇게 해서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나와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전도사님이라고 계신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럭저럭 다니면서 믿었다.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믿은 세월이 어언 50년이다.
 
봉림교회 역사에서 잊지 못할 일이 있다. 교회가 예전에 창고처럼 허름해져서 빨간 벽돌로 리모델링을 했다. 성도들 모두가 힘을 합해서 일했다. 외벽을 단장했으니 내부도 예쁘게 손보고 싶었고 특히 마루를 새것으로 갈았으면 좋겠는데 고칠 돈이 없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마루를 고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전교인이 합심으로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 주변 교회 여전도 회원들이 다 모여서 연합예배를 드리는 계삭회를 봉림교회에서 했다.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가 꽉 찼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평소에 멀쩡하던 마루가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앉아버렸다.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계삭회원들이 마루를 고칠 헌금을 거두자고 했다. 그때 회원들이 십시일반 헌금을 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마루가 무너져서 교회 내부를 모두 수리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이재인 권사는 교회를 짓거나 사택 공사를 할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했다. 1977년에 교회를 건축하는데 전교인이 힘을 합쳤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이면 여자들은 광주리에 흙을 이어 나르고 남자들은 지개에 져서 흙을 날랐다. 초가집이던 집을 함석집으로 고치는 일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지붕 뼈대를 잇고 흙을 이겨서 지붕을 만들었다. 밤마다 야간작업을 하여 교회를 완성했다.
 
그때 대들보와 지붕을 얹을 나무가 필요해서 나무를 베어서 헛간에 두었다. 그때는 누구나 나무가 필요하면 산에서 베어올 때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범법행위였다. 마을 사람 누군가가 이 사실을 투서해서 교인 중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다. 이 권사가 군청에 가서 행정지도를 받고 홍성 법원에 가서 재판까지 받아서 당시로선 꽤나 큰 벌금 20만원이 넘는 돈을 냈다. 농투성이인 이 권사가 나무 몇 개 때문에 관공서에 불려 다니며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짓기 위해 수많은 고생을 했듯이 성전을 얻기 위해 겪은 고초였다.

강영길/온누리교회, 소설가, 내인생쓰기 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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