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를 슬프게 하지 말라- 김기순 집사(상)

목회자를 슬프게 하지 말라- 김기순 집사(상)

[ 향유와 옥합 ] 향유와 옥합

강영길
2013년 04월 24일(수) 09:58
필자는 밑도 끝도 없이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교회에 가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가 가장 강하게 남은 그 교회에는 분명히 남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작정 찾아간 하회교회에서 바지런한 일꾼 김기순 집사(73)를 만났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안동 하회교회는 현재 92년 된 교회로 이 터가 곧 6.25 순교지다. 전쟁 때 흘린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다. 하회마을은 전 국민만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알아주는 전통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 사당이 7개, 절이 2개, 신당이 3개가 있다. 귀신을 상징한 장승들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그러니 제례와 전통 의식이 많다. 그야말로 온갖 잡신이 모인 동네다. 이런 이유로 담임인 김명진 목사와 전교인이 끊임없이 대적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교회다.
 
옛날엔 하회마을은 가난하고 외진 곳이었으므로 교역자가 없었다. 주일 예배는 다양한 사람이 와서 인도를 했는데 때로는 전도사님이 오셨고 때로는 신학생이 오기도 했다. 수요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에 오실 목회자가 없으면 학교 교장 선생님 한 분을 초빙했다. 그 분은 60리 밖, 학가산 기슭에 살았다. 거기에 가는 차가 없으니 걸어서 그 교장 선생님께 예배 인도를 부탁하러 가야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게 아니라 그분과 약속을 하러 60리를 걸어가서 다시 모시고 돌아오는 것이다. 아침 먹고 걸어가서 그 분과 상담해서 약속을 잡고 돌아오면 밤중이 됐다. 산 능선을 타고 오솔길을 따라 거기까지 오가는 데 열 시간이 넘게 걸렸다. 봄 가을에는 좀 걸을 만 했으나 여름과 겨울에 걷기에는 너무나 먼 길이었다.
 
   
또 교역자가 오시면 식사를 받들어야 했다. 김 집사가 멀리서 사니까 토요일 저녁에 들어와서 교회에서 자야 아침 식사를 해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면 가족들은 내버려두고라도 교회에서 자고 아침을 차려 드렸다. 목회자 모시기가 정말로 수월찮은 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비하면 오늘은 목회자가 많아서 교인들이 참 편해졌다. 하지만 몸이 편해진 대신 신앙은 더 느슨해졌다. 본인이 60리 길을 오가던 그 실천과 믿음을 잃어간다고 김기순 집사는 아쉬워한다.
 
김기순 집사가 사는 집은 교회에서 2km 가량 떨어진 하회2리다. 매일 새벽기도를 걸어서 다니다가 아주 큰 일을 만난 적이 있다. 달이 있는 날은 그나마 사방을 볼 수 있는데 달 없는 밤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다. 산모퉁이를 따라 난 도로를 꼬불꼬불 걸어온다. 2월말쯤 되면 얼음이 녹을 때다. 그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들판 전체를 쪼개는 듯이 거대한 소리가 '짜작' 울린다. 그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서 식은 땀이 다 난다.
 
그 새벽 김 집사는 성경책 가방을 들고 교회로 가고 있었다. 하회 마을로 돌아들어오는 어귀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나 그것은 짐승의 소리거니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두 개의 어둠이 움직이더니 힘으로 김 집사를 넘어뜨렸다. 어둠 속이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깡패 두 명이었다. 김 집사가 넘어지자 깡패 한 명이 발로 가슴을 짓눌렀다.
 
"아주메요. 돈 내 놓으이소."
 
장정의 발에 가슴이 눌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강도들이 김 집사를 때리고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김 집사는 그 깡패들을 위해 기도했다. 오죽하면 이런 짓을 할까? 구사일생,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김 집사는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똑같이 새벽기도를 다녔다. 아직도 그때 맞은 자리가 고통스러울 때가 있단다.

강영길/온누리교회, 소설가, 내인생쓰기 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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