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마중물

인간 본성의 마중물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3년 03월 06일(수) 14:15

스토커(박찬욱, 드라마,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3)

'스토커'는 스토킹을 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영어의 철자를 보면 그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영화의 내용도 그런 점이 없진 않지만, 아마도 동음이의적인 말을 통해 영화를 대하는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제시해보이고 있진 않아도 아버지는 딸이 삼촌을 많이 닮았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딸의 악한 본성을 감추고 선한 본성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그의 편지를 인디아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사냥을 가르쳤다. 이는 비교적 작은 악을 통해 더 큰 악을 막고자 했던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디아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아버지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좌절하고, 결국 인디아는 삼촌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인간 본성이 발현하기 위한 마중물이 있음을 주장한다. 나는 내 스스로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것들이 함께 작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인디아의 독백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마중물은 지하수 상태에 있는 물을 펌프질로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삼촌은 악한 본성의 마중물이며, 아버지는 선한 본성의 마중물이다. 언제나 동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많은 경우 인간의 본성은 잠재해 있다가 촉발될 때 발현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용서와 수용과 관용 그리고 공평한 사랑 등이 갖는 의미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이중적이다. 선한 면이 있는가 하면 악한 면도 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한다 해도 타락 이후에 주어진 은혜, 곧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선한 본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능력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것을 성령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고백한다. 이것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회심의 가능성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악한 본성이라도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우리 안에 숨겨진 선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중적인 본성은 인간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자극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선한 본성이 길러지기도 하고 악한 본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은 숙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종종 듣는 말 가운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너를 만나고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무책임하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지만, 내 안의 악한 본성이나 선한 본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함으로써 은혜로 주어진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있다.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을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은 굶주림에 지쳐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수고하고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을 바르게 이끌어간다 해도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여지없이 발현되는 까닭은 마중물이 사회도처에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들은 좌절하는가? 사탄의 영향력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마중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자녀라면 부모에게, 선생이라면 학생들에게, 학생은 선생님에게, 목사와 장로라면 교인들에게,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마중물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선한 본성으로 가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이 지배하는 인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누구를 탓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중물로 살았는지를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고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지 않기를 그렇게 강하게 말했던 까닭은 바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본성을 이끄는 마중물에 대해서도 주의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마중물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 일이다. 복음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방향에서 유효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철학이나 이념을 전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나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주며, 또한 나를 죽임으로써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는 존재가 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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