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목회, 문화적 소통이 필요하다.

창조적 목회, 문화적 소통이 필요하다.

[ 문화목회 이야기 ] 문화목회 이야기

성석환 목사
2013년 02월 19일(화) 16:25
소통부재의 사회
 
지난 대선국면에서 지도자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던 것이 '소통의 능력'이었다. 국가 지도자가 국민들과 소통을 하지 않으면 지도자 본인도 불행해지고 국민들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목회자나 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 구성원들과 또는 그 사회의 이웃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본인도 괴롭고 그로 인해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고통도 너무 크다는 것을 많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창조적인 문화목회'도 '소통의 능력'이 없이는 실천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통의 사전적 정의는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이다. 영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서로의 의사가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通)'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서로 통한다'는 것은 단지 말과 생각만이 아니고 정서와 느낌, 취향과 행동양식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무엇을 해도 즐겁고 신이 난다. 통하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리 훌륭한 명분과 대가가 있어도 즐겁거나 신나지는 않는다. 서로 인격적 관계, 즉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I and It)'의 도구적 관계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개인 간의 불통도 힘든 일이지만 사회적 소통의 부재는 구성원의 연대를 허물고 집단이기주의를 부추겨 공동의 목표설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하나의 목표와 가치에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 한다는 발상도 폭력일 수 있다. 다양한 가치와 질서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공존이 상호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타자를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에만 몰두하여 타자를 제거하려고 하는지 하는 것이다.
 
하버마스(J. Harbermas)는 근대가 본래 추구했던 합리적 의사소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자를 소외시키는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그는 문화적 영역에서 구체화되는 공론장의 형성과정에 주목하고 근대적 합리성이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근대의 공적 영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푸코와 같은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은 아예 근대적 합리성 자체를 의심하고 타자와 세계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상징적 실천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모든 개인과 집단이 배타적 이기심에 사로잡혀 멈추지 않는 탐욕과 끝없는 경쟁에 온 나라가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교회나 사찰과 같은 종교계도 별다른 구별된 양식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불통의 상징처럼 비난받는 일이 많아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다. 남을 말을 듣지 않고 소통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라면 앞으로 이 문화의 시대에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이 민주주의가 성숙해져가는 과도기적 고통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 역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산통으로 봐야한다는 입장도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정말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와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목회자는 회중의 생각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한 신앙 안에서 서로 다른 형식과 전통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하고 수용적인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은 이 시대의 정신이자 요구이다.
 
성석환 목사 / 도시공동체연구소장ㆍ동숭교회 문화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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