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디아스포라 선교

허석구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1월 04일(금) 15:17
[땅끝편지]

(3) IMF 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에 선교사들에게도 외환위기의 느낌이 왔다. 일반 직장인들은 퇴직을 당하고 가족들이 힘들어 했다. 싱가폴 한인교회 새벽기도회가 만원사례가 될 정도였다. 그 많던 단기 선교의 씨가 말랐다. 단기 선교팀이 많은 비용을 쓰면서 선교지를 방문하면 현지인들 중에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도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외환 위기가 왔을 때, 단기 선교팀이 뚝 끊어지고, 선교활동도 수그러드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한번은 싱가폴 한인교회 교역자 가족 수련회를 인도네시아 바탐섬 부근의 꾸붕섬에서 가지게 되었다. 바탐섬 이민국에 한국인이 30 여명 도착하자 이민국 직원들이 싱글벙글하면서 대환영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단기 선교에 대하여 지지자가 되었다. 국가적으로 외환위기같은 어려움이 닥치면 선교활동에도 장애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2012년 근래에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유학하거나 직장을 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 외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 과정이 있는데, 과거에는 일본인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2008 년에는 한국학생이 60%, 2012년에는 80%에 이르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한류열풍과 함께 세계 곳곳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하는 것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4)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외환위기의 후유증이 대단한 기승을 부리고 있던 2000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필자도 후원교회로부터 선교비가 끊긴지 2년이 된 때였다.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학생들이 1백12명에서 67명으로 급감하게 되자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초등학교 이사진들의 회의 결과 한국에서 파견받아 오는 교장대신에 싱가폴에 거주하는 한인들 가운데서 교장을 뽑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교장을 맡을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문제였다. 마침 싱가폴 한인교회 장로 한 분이 싱가폴 초등학교 이사였는데, 그 소식이 나에게 전달되어 나는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사장 말씀이 낮은 월급과 높은 월급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낮은 월급을 택했다. 후문에 나를 가리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었다고 했다. 방학 기간 중에는 선교활동을 하였고, 주일에는 싱가폴 한인 교회에서 설교와 행정을 맡았다. 1년을 돌이켜 보니 사회를 위해서 봉사를 했지만 이 때까지 해왔던 선교활동을 마음껏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 때는 지금처럼 후원교회에서 한국 학교 교장생활도 선교활동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안식년을 핑계하고 교장직을 1년만에 사직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함께 했던 교직원들에게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이 선교활동을 계속하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자비량 선교를 경험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5) 세계에 흩어져있는 한인 교회를 통한 선교(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나는 10년간 싱가폴 한인교회에서 선교와 행정과 심방을 담당했다. 1990년대에는 선교사가 무슨 한인교회를 돕느냐하는 비판도 있었던 때였다. 심지어 선교사들 중에서도 한인교회를 하는 선교사는 선교사가 아니라고까지 하던 때였다. 그러나, 10년간 한인교회를 싱가폴에서 섬겨본 결과 한인교회를 통한 선교활동이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 싱가폴에 가까운 바탐섬에 선교관을 매입하여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보내고, 협력하며 일했다. 지금은 바탐섬에 바탐신학교, 신학교기숙사, 바탐 초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유치원도 4개이다. 바탐섬과 인근 작은 섬에도 복음을 전하며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감격적인 복음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수마트라 빨렘방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선교사, 인디아의 첸나이(Chennai)로 파송된 임하여 여선교사, 캄보디아로 파송받은 4 가정이 있다. 동말레시아 사라왁의 현지인 전도목사 다섯분에게 협력선교비를 15년 이상 보내었고, 이 분들을 통한 선교의 열매는 지면이 좁아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선교사 한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싱가폴 한인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초교파적으로 24가정의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작품이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선교사는 거짓선교사이다. 모두 하나님의 도움과 동료 선교사들의 협력이 있었고, 특히 선교지에 있는 한인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의 열매가 20년 후에 이만큼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 땅에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한인 선교를 하는 선교사는 단순히 한인들을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정신을 품고 목회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에 눈이 뜨이도록 한다. 사실, 필자가 한국에 있었을 때 선교에 관한 책자를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나보다 먼저 선교사로 나간 동기 목사의 선교편지를 받아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선교편지를 보내는 것은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후원할만한 위치가 되면 물질적 후원도 해달라는 것이다.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하지 않는가? 물질만 보내고 선교사를 위해 기도를 간절히 안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요즈음은 인터넷도 있고, 인터넷 전화, 이메일, 페이스북 연락수단이 다양해져서 좋은 시대이다. 선교사에게 관심을 보이고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면 좋다.
 
해외 한인교회를 통해서 선교사를 또 파송하게 된다. 싱가폴 한인교회 집사 두 분이 선교지에 함께 갔다가 H그룹에 속한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이다. 싱가폴에 단순히 신학교 유학생으로 왔던 전도사, 목사들이 인디아, 캄보디아, 중국, 인도네시아로 선교사 파송을 받아서 나간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2-3년 주기로 바뀌는 교인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한인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에 접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많았다.
 
해외 한인교회가 자립하게되고 선교에 눈이 뜨이면 가까운 선교지에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현지 신학생 가운데 유망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며, 신학교를 세우고, 교도소에 가서 전도하며, 베트남 난민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교인들과 함께 하였다.  싱가폴에 가까운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선교관을 구입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세우게 되었다. 신학교도 세웠다. 수마트라가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이었지만, 수마트라에 본 교단 선교사가 전혀 없었을 때였고, 그 곳으로 가서 활동할 어떤 선교사의 요청으로 땅을 구입하여 농장과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선교활동은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협력하며, 한국의 여러 교회와 교우들과 인도네시아 교인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정신에 충만한 한인교회 교인들과 목회하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사업이 탄력을 받게된다.
 
해외에 있는 한인 교회는 대부분 선교관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폴 한인교회의 선교관은 무료로 운영되었다. 선교사들과 비전 트립(vision trip) 선교 활동을 하러온 분들이 잠간 머물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1년에 1천여명이 평균 4일 정도 머물다가 간다. 인도네시아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많은 교포들이 찾아와서 숙소로 사용한 적도 있다. 비자 수속을 위해서 2-3일 머무는 선교사들에게 무료 쉼터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처음 선교지에 부임하는 선교사들은 한인교회를 위해 적극 협력하는 것도 좋다. 한인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의 정보를 얻는 것도 상호협력선교가 될 것이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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