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4~29일

12월24~29일

[ 가정예배 ] 12.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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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1일(금) 13:36

[가정예배]

월-하나님의 말씀
본문: 히 4:12-13
찬송가: 202장
 
신학자 칼 바르트(Barth Karl)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저자들이 고유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모여서 성경이 되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모으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사도들과 교사들을 감동시키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사건과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들에 의해서 초대교회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성경이 단순히 사람의 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주신 신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사람의 글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쉽게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래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보통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문자화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는 놀라운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첫째, 살리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은 살아있다. 생명의 능력이 있다. 성경 말씀 속에는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성경 외에 그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죄를 용서 받게 하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오직 성경만이 할 수 있다. 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죽었던 영혼이, 가정이, 건강이, 용기가, 의욕이, 희망이 살아나기를 바란다.
 
둘째, 하나님이 말씀에는 활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능력을 얻을 수 있고, 새로운 권능을 얻을 수 있다. 내 영혼이 힘을 얻는다. 내 삶이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침체된 것들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말씀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자기 사명을 다 하도록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예리하게 혼도 영도 관절도 골수도 쪼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불의한 것, 거짓된 것, 죄악된 것을 다 도려낸다. 이처럼 사람이 변하는 것은 말씀의 능력 때문이다.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마음이, 생활이, 가정이, 인생이 새로워지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종찬목사 / 수원성북교회


화-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말씀: 마태복음 25;31-46
찬송가: 515장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구세군 자선냄비에 거액을 쾌적한 익명의 기부자가 있다. 이 남성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평생에 부모님은 이웃에게 정도 많이 주시고 많은 것을 나눠 주셨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평소 부모의 언행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같은 날 신문기사 1면에 "딸 재산이 4백50억인데 부모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4년간 3천8백만원 지급"이라는 기사와 함께 6억이 넘는 주식을 가지고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되어 2년 동안 2천1백11만원을 받았다는 기사도 크게 보도됐다.
 
어떻게 한 사람은 4백50억이라는 재산을 가지고도 부모를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만드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돌아가신 부모의 뜻을 받들어 1억이 넘는 돈을 이름도 없이 2년째 내고 있을까?
 
본문 31-33절을 보면 엄숙하게 선포하는 말씀이 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오른편에 앉은 양들에게 사랑스러운 음성과 위로가 넘치는 말씀으로 선언하신다. "내 아버지에게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엄하게 선고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그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신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이 영원히 뒤집을 수 없는 양과 염소의 판결에 둘 다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이다. 이에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며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번 성탄에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자녀들과 함께 돌아보며 나누는 삶이 되어 진정 하나님의 복이 자손 대대로 함께 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고통 받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옵소서. 온 세상이 주님이 베풀어 주신 그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준연목사 / 고평교회


수-세 개의 열쇠
본문: 고린도전서 13:13
찬송가: 342장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기복신앙을 갖고 욕심으로 산다면 수많은 혜택(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약속된 천국,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 등)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인, 하나님의 백성, 청지기,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고 순교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으로 성공하게 하기 위하여 세 개의 열쇠(Key)를 주셨다.
 
첫째, 믿음의 열쇠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할 수 없는 일보다 휠씬 적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승리하게 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승리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참된 승리의 특권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독생자인 대속제물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첫 번째 열쇠이다. 실수와 죄를 저지르고 절망할 수 밖에 없을 때도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좋은 열쇠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심을 믿고 원수도 사랑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꼭 활용해야 할 믿음의 열쇠이다.
 
둘째, 사랑의 열쇠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은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원수가 되고 서로 해하고 죽인다. 그래서 우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 사람과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열쇠를 주셨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는 사랑이 없음에서 시작되며 사랑의 실천에서 해결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사랑의 열쇠를 주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가족 되게 하시고 형제 되게 하시는 사랑의 열쇠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신앙인들이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하지 않고 논리와 힘과 물질로 해결하려한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우리가 받은 사명이다.
 
사랑은 받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행복해지고 모범된 신앙인이 된다. 요즘 부부, 형제, 이웃간에 사랑이 말라버렸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와 교회간의 사랑도 잃어버려 세상과 다를 것이 없게 된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망의 열쇠이다. 미래의 불투명함으로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죽으면', '잘못되면', '병들면', '배신당하면'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섭리하시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미래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망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미래로 향해야 한다. 아울러 소망이 미래로 복되게 하는 열쇠라면 소망의 반려자는 인내이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믿음으로 역사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는 소망의 인내를 믿음의 승리로 칭찬 듣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처럼 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용목사 / 신도교회


목-우리의 희망, 에수!
본문:요 20:19~23
찬송가:95장
 
우리 국민의 8명 중 1명이 알콜, 도박, 인터넷, 마약 등 4대 중독에 빠져있다고 한다. 사실 이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물질적인 가난에 눌려 있고 종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은 상처와 갈등으로 아파하며 마음의 병이 심화되어 있다. 과연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는가? 현실적인 세상에서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럴수록 희망을 가져야 되고 희망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끊임없이 희망을 전해야 하고, 성도는 이들 세상에서 희망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류역사상 이 땅에서 가장 큰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기쁨이라면, 가장 큰 기적은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로 고통당하고 사망의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영생의 길,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이 땅에 가장 큰 희망의 역사이다.
 
특별히 대강절을 맞아,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다.
 
첫째,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복음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불안한 제자들에게 주신 희망의 메시지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삶에 대한 염려가 많고 가난이나 질병에 대한 고통이 있다. 이때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예수님의 평안은 한 마디로 부활 승리의 평안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이기신 평안으로 이는 우리 인생의 어떤 고난도 위기도 죽음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승리의 평안이요, 하나님 능력의 평안이다.
 
둘째,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이 주시는 사명이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명과 비전을 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 살수록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로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휩싸이며 꿈도 사라진다. 이런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시며, 너희는 세상을 향해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들고 가라고 사명을 주신다.
 
셋째, 우리의 희망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의 영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부요케 하시길 원하셨고, 궁극적으로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려고 오신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생명을 살리는 영이요, 치료의 영이시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의 인생이 회복될 것이고, 그로인해 가정도 변화되며 나아가서 우리의 사회도 변화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픔과 상처와 근심이 가득한 이 세상에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먼저는 내 자신이 회복되고 소생케 하시며,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식목사 / 가나안교회


금-예수님 안에서 
본문: 요한복음 2:1-10
찬송가:569장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말씀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이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특별히 여겨지는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본문에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의 내용은 단순하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이적은 어쩌다가 우연히 행하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된 인생이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 속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영적비밀이 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의 중심이 포도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잔치집과 포도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잔치집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두 바라는 게 있다. 만족과 기쁨이다. 잔치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만족스럽고 기쁘게 하는 음식이 바로 포도주이다. 포도주는 음식에 맛을 더해주고 사람들의 흥을 돋구어 줬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건 잔치집에는 포도주가 떨어져서는 안되었다.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면 만족과 기쁨이 사라진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으로 잔치를 망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가나마을의 잔치집에 일어났다.
 
만족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삭개오 ,수가성의 여인, 니고데모이다. 이 사람들은 다같이 포도주가 떨어잔 잔치집과 같은 위기를 만난 사람들이다.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와 부가 있엇지만 실제 사회생활은 만족과 기쁨이 없었다. 수가성의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해야 할 만큼 가정생활이 외롭고 슬펐다. 니고데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니고데모는 정통 유대인이다. 그는 신앙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못한채 회의와 의심으로 고통당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장소 다른 환경이지만 다같이 기쁨과 만족을 잃어보린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 가나의 잔치집에도 여기 이 사람들에게도 새 포도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 포도주가 떨어진 집에 새 포도주를 주신 분이 계신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이시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새 포도주시라는 걸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기쁨과 만족을 잃어버릴 위기에 빠진 잔치집에 도리어 더 큰 기쁨과 만족을 주셨다. 그리고 이런 일은 가나의 잔치집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사는 기쁨과 만족을 잃어버렸던 삭개오에게, 수가성의 여인에게, 니고데모에게도 일어났다.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만족과 기쁨이 있는 살맛나는 세상을 살게 됐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55절에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 오직 우리의 새 포도주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로 살자.
 
<오늘의 기도>
주님 세상의 헛된 것에 속지 말게 하시고 새포도주이신 예수님으로 날마다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경근목사 / 행복한교회


토-성탄절의 네 번째 촛불이 켜지다-동행
본문: 마태복음 1:22-23
찬송가: 110장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중의 하나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이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주의 천사는 이 점을 구약의 이사야 7장 14절의 성취로 알리고 있다.
 
이사야 7장 14절의 앞절인 7절과 11절에 보면 반복되는 말씀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시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최고의 존재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측면은 하늘의 관점이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사용한 단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동행이란 단어이다. 구약의 '하라크'(동행)라는 단어는 자주 나온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동행이다.
 
동행은 동승하고 다르다. 동승은 목적지를 향해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버스 옆자리에 모르는 누군가가 타고 가도 동승이 된다. 그러나 동행은 다르다. 동행은 아는 사람, 친밀한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이다. 친한 사람과 어느 목적지를 향해 동행하면 축복이 따른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몸소 경험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세심한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 번민과 죽음을 통과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그 어떤 희노애락도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깊이 나눌 수 있다. 갈수록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 속에서 동행하면서 친밀감을 경험할 때 어느 누구에게서도 얻지 못한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탄의 축복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여야 한다. 친밀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고대가 있어야 한다. 예배를 즐거워하고 찬양을 전심으로 하고 말씀을 꿀송이보다 더 달게 읽어야 한다. 둘째는 기도를 하되 간구기도 보다는 회개기도, 중보기도에 익숙하도록 집중해야한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은 친밀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친밀감을 사라지고 답답하고 공허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회복하는 방법이 회개기도이다. 다윗처럼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는 기도가 자주 있어야 한다. 회개는 나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서 통회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나를 받아들이신다. 이때 친밀감은 회복되는 것이다.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계절이 되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오, 예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늘의 뜻을 살피고 감사와 행복을 우리는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익목사 / 성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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