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례선생님 권유로 여전도회 활동

김필례선생님 권유로 여전도회 활동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여전도회에 첫 발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23일(월) 09:29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이사장 김필례 선생님이 자주 나더러 교장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 반드시 여전도회 봉사를 하라고 강조하셨다. 여전도회는 장로교회 교단(통합)에 속한 여성 단체이고, 또 정신학원은 그 교단에 속한 유일한 여자 중등학교인데 이 학교의 여성 교장은 여성 단체를 잘 섬겨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강조하셨다. 처음 한동안은 이 말씀이 나에게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듯 건성건성 지나쳤다. 나는 영락교회 여전도회의 회원이기는 해도 월례회에 참석해 본 일이 없었다. 회비는 꼬박꼬박 냈지만 어쩌다가 마주치는 회원 권사님들이 월례회에 참석하라고 붙잡으면 웃음으로 대답하고 살며시 빠져 나오곤 했다. 그런데 김필례 선생님이 계속 나를 만날 때마다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이 교장, 여전도회 봉사하십니까?" 횟수가 거듭되면서 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도회에 관심을 갖게 된 변화는 아니었고 다만 이사장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사장님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이제라도 영락교회 여전도회의 월례회에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참석해야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리하여 김필례 선생님께 떠밀려서 나는 여전도회 모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영락교회의 여전도회 모임에 참석하게 된 그때 당시 내 나이는 40대 초반이었고 여타 회원들의 평균 나이는 60대였다. 여전도회 회원들은 이미 나와 친숙해진 사이였다. 그 이유는 내가 매 주일 영락교회의 여성 제직반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 성경공부반에는 어림잡아 5백명 정도가 참석했다. 내가 그 성경공부반을 맡았을 적에는 약 3백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부흥했다. 그래서인지 한경직 목사님도 나를 칭찬하시며 아주 좋아하셨다. 이 성경공부반에서 가르쳐 왔던 점이 나도 모르게 나의 여전도회 활동에 기반이 되었다. 대다수 회원들이 주일마다 나를 만날 때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으니 이미 서로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또 그들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나의 가르치는 은사를 파악했던 까닭에 기대감을 갖고 나를 적극적으로 여전도회 모임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김필례 선생님이 강하게 강권하셨기에 마지못해 여전도회 모임에 참석했으므로, 할 수만 있다면 교장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출석 부르고 나서 곧바로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잔꾀를 부린 약은 생각은 빗나가기가 일쑤였다. 뒷자리에서 모임의 분위기를 독려하며 회원들을 살피고 있던 임원들에게 붙잡힌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아주 소극적인 자세로 끌려가다시피 여전도회 모임에 참석하는 내가 1968년에 여전도회 서울연합회의 임원으로 뽑혔다. 그것도 부회장으로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건이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도 있나뇨?" 마치 새장에 갇힌 새 같은 느낌을 가진 나는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은 심정으로 임원직을 사양하고자 뿌리쳤다. "나는 (교장 일이 바빠서) 못합니다. 아니, (아직은 너무 일러서 임원을) 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나를 강하게 붙잡아 끌어들였던 영락교회의 여전도회가 이제는 나를 공천하여서 강하게 밀었다. 결국 끝까지 사양하지 못한 나는 할 수 없이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임원으로 선출된 내가 여전도회의 연합회 활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 당시에는 마땅하게 여전도회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때는 옥호열 선교사 부인이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의 협동 총무로 일하면서 살고 있는 사택 안에 사무실을 두었다. 그 당시에는 연지동 1-1번지에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었는데 정신여자중ㆍ고등학교와 경신학교가 그 자리에서 시작됐고 그 근천에 한국 장로교회가 태동한 요람이자 터전이 있었다.
 
이렇게 선교사의 사택에 있던 사무실을 이전했는데 영락교회 근처에 있는 빌딩의 방 하나를 세 얻어서 거기로 옮겨갔다. 이 무렵의 여전도회는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1950년에는 6ㆍ25 전쟁이 일어났고 또 향후 10년 동안에 장로교회의 교단이 세 차례나 분열된 상황에서 여전도회 역시 힘겹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시기에 김필례 선생님이 탁월한 지도력으로 여전도회를 잘 이끌어 오셨는데 그 점이 비로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헌신해 오시던 김 선생님이 1959년에 여전도회의 일을 손에서 놓으셨고 이어서 주선애 선생님이 그 일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신의경 선생님이 그 일을 이어 받으셨고, 또 그 다음에는 김금련 회장님이 맡아 하셨다.


이연옥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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