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마치고 정신중ㆍ고등학교 교장으로

유학을 마치고 정신중ㆍ고등학교 교장으로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06일(금) 17:47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1965년 8월,4년 조금 못 되는 기간의 미국 유학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나는 미국 장로교회 여전도회가 주관하는 특별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여전도회가 국제교류 차원으로 해외 13개국 여전도회의 대표를 초청하여 친선과 교류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나는 한국 장로교회 여전도회 대표의 자격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그때 나는 미국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많은 교회를 돌아보았고 다양한 기독교 기관과 단체를 방문했다. 그동안 학위 과정을 밟으며 공부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느라 여행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는데 아주 편한 마음으로 미국 땅을 두루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한 여행이었고 이 여행이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 여전도회 활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귀국과 더불어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일했던 정신여자중ㆍ고등학교로 다시 부임했다. 중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도록 내정되어 있었던 나는 1965년 8월부터 김성권목사님의 후임으로 고등학교 교목실장이 되어 학생들의 신앙훈련과 기독교교육을 총괄했다. 그러면서 교장 강습을 받았다. 1968년부터 나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일했고 1969년에는 중학교 교장 직무대리에 취임했다. 그리고 1972년 2월에 14대 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76년 2월에는 14대 정신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나의 교장 취임은 흔히들 말하는 '낙하산 임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학교에서 10년,20년,30년 오래 근무하며 학교 발전에 공을 세운 선생님들이 여럿인데 이분들을 다 제쳐놓고 이사회가 미국에서 공부한 연유로 나를 교장으로 임명한다고 결정했으니 이런저런 말이 나오지 않을리가 없었다. 특히 나이 드신 선생님들 몇 분은 내가 교장으로 임명된 점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계셨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교장 업무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학교에서 최고참 선생님이 교감이 되셔서 나의 업무수행을 위해 성심성의껏 도와주셨다. 이분은 나보다 나이로도 위인 연배이고 교무주임으로 오래 일한 다음에 교감이 되었으므로 교장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 그런데 이분은 이왕 이사회가 이연옥을 교장으로 임명한다고 결정했으면 그 결정대로 학교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불평불만 없이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셨다. 이렇게 선생님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교감 선생님이 나를 도우셨기에 교장으로서 권위 있게 학교의 질서를 잡아 나가고 또 학교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정신학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사학이므로 동문회 대표들이 이사로서 학교 일에 관여했는데,이 여성들이 여성 교장인 나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사장 김필례 선생님께서 업무 처리의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세심하게 보살피며 조언해 주셨다.

매일 아침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직원조회로 모였다. 경건회를 짧게 가진 다음에 회의를 시작했다. 교장,교감으로부터 선생님들이 서열에 따라 차례대로 성경 한 구절을 읽고 기도드리는 경건회였다. 직원조회는 그날의 학사일정을 확인점검하며 학교행사를 알리고 필요한 경우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지시사항을 부서별로 주임 선생님들이 전달했고 마지막 종합정리를 교감 선생님이 했다. 아주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에는 교장이 전체 교사들 앞에서 발언했다. 이를 위해 교장은 사전에 미리 교감과 의논하여 발언의 내용과 수위를 조절했다. 이런 식으로 정신여자중ㆍ고등학교의 직원조회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건실한 회의전통으로 계승되었는데 이 전통을 이어가고자 나는 김필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김필례 선생님은 지난 날 내가 교목실의 평교사로 재직했을 때는 아주 엄격하셔서 마주 앉아 있기조차 조심스럽고 두렵게 느껴졌던 분이었는데 내가 교장으로서 이사장이신 그분을 모시게 되니 '모성애'가 정말 남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 먼발치에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호랑이 교장' 김필례 선생님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이사장님이셨던 것이다. 한번은 이사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분은 거의 매일 학교에 출근하셨다. 교장실은 2층에 있었고 이사장실은 1층에 있었다. 이분이 나에게 전교 학생의 건강검진을 실시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은 보릿고개를 간신히 극복해 가는 초창기 산업화 시대였고 사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폐결핵에 감염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중학교 전체 약 2천1백명 학생의 건강을 검진하면서 가슴 엑스레이 사진촬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폐결핵 환자 28명이 발견됐다. 그러자 이사장 김필례 선생님은 미국의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미국에서 파스라 불리는 결핵약이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이 약이 위장을 상하게 해서 위장 보호약을 김 이사장님이 사비로 구입하셨다. 그러고 나서 28명 학생의 부모 한분 한분을 이사장실로 오게 해 약을 건네주며 복용법을 설명하셨다.

나는 그분 곁에서 이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학생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으며 배워 나갔다. 같은 양식으로 김 이사장님은 학생체벌을 절대로 못하게 했다. 체육시간에 담당 선생님이 학생을 체벌했다가 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학생을 체벌한 체육 선생님에게 당장 시말서를 쓰게 하고 다시는 아이들을 구타하고 때리지 못하게 하셨다.


이연옥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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