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9~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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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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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4월 05일(목) 10:16

월-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휘장
본문 : 마7;45-54, 히10:20
찬송가 : 252장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을 지금의 교회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당시의 성전 구조는 성막처럼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성전의 바깥 뜰과 성소와 그리고 지성소가 있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것은 휘장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휘장의 두께가 약 15cm정도 되어서 황소 두 마리가 양쪽에서 잡아 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고 한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절규 한 후 운명하심과 동시에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간이 찢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 것이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 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찢겨진 것이라고 히브리서 10장 20절은 기록하고 있다.
 
찢으신 휘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율법의 제사의 시대가 끝나고 예배를 드리는 은혜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을때 마다 짐승의 피로 희생 제물을 드려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그 사건이 예수님이 제물로 드려진 마지막 제사이며 영원한 제사였다(히10:12)) 그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약 제사는 폐지되고,예수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짐승의 피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보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사의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들여 그 피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고,휘장이 찢어지듯 그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셋째,죄와 저주가 끝나고 새로운 길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휘장이 찢어졌다 는 것은 곧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진 것인데,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고난 받으신 것은 목적이 분명하다. 우리의 죄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와 저주가 사라진 것이다.

"그가 찢김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새롭게 산 길이 열렸다. 찢겨진 휘장을 묵상하며 예수님 보혈의 은총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휘장이 찢어지듯 십자가에서 찢겨진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주님의 보혈의 고통을 생각하며 겸손이 은혜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에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갑상목사 / 참좋은교회


화-산 소망의 신앙
본문: 베드로전서 1:3-4
찬송가: 488장
 
얼마 전 한국인의 건강수명과 기대수명 분석 자료를 보았다. 놀랍게도 건강수명이나 기대수명 모두 서울 사람이 가장 높았는데 기대수명이 80.4세나 된다. 이에 대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면 평소 서울은 다른 지역보다 공기도 나쁘고 스트레스 지수도 심할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수명이 높은 것은 의료문화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응급체계도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고 생존 노력 또한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예측하는가? 아니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가? 많은 분들의 소망이 '9988234'라고 말한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쯤 아프다가 사흘 만에 죽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죽음에는 빈부귀천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영원세를 산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오늘 본문과 같은 환희에 넘치는 고백을 한다.
사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 무엇보다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고 그 역시 주님을 지극히 사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19:27)"라고 말할 만큼 그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다. 이처럼 사랑했던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는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었다. 그는 이 감격으로 평생 동안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한 마디로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란 뜻으로 '산 소망의 신앙'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산 소망을 오늘 우리에게도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일전에 어느 산부인과에 갔는데 병실 벽에 '기쁜 소식'이란 제목의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산부인과의 기쁜 소식이란 순산,임신,수유,효과적인 자녀 양육비결 등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태초부터 사랑하셨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매우 감동적이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월남 이상재선생을 어느 날 일본 기자가 찾아왔다. "선생님, 인도의 간디는 100살까지 산다고 했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입니까?" 그때 이상재선생은 물끄러미 기자를 바라보면서 나무라듯이 말했다.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긴 왜 죽어!" 이 말이 우리 모두의 확신과 고백이 되면 좋겠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산 소망의 믿음을 주셔서 이 땅의 모든 고난과 절망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소망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배성태목사 / 명선교회


수-부활의 신앙과 소망
본  문 : 고린도전서 15:1~11
찬송가 : 159장
 
많은 사람들은 인생은 무덤에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에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열달 동안의 짧은 생명과 태 밖에서의 보다 긴 수십 년의 긴 생명이 있듯이 거시적으로 보면 이 땅에서의 짧은 생명이 있고 땅 밖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 중간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었고 교회의 시작이었다. 부활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통해 은혜를 나누어 보자
 
첫째로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예언한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요 골자라는 의미이다. 기독교에서 부활의 교리를 제거해 버리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없어져 버린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다른 점이다.
 
둘째로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부활을 부정하려는 여러 가지 학설들과 비판들이 있었지만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성경이 그 역사를 확인하고 있고 당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기에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에 그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다. 로마서 1장 4절 말씀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우리의 메시아가 되셨고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
 
셋째로  부활은 은혜의 근거이다. 은혜란 '무조건 주는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사도된 은혜를 조화시킨다. 10절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8절에서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교회가 주어졌고,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소망이 주어졌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한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이 우리에게 참다운 소망이 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진리가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 된다.
 
<오늘의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의로 불의를 이기셨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셨고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분명한 승리의 삶을 약속해 주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민목사 / 의정부시민교회


목-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 요 1:1-18
찬송가: 96장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 계시며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첫째,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데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했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한다. 즉,'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시다.
 
창 1장3절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히브리서 1장 1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시다.
 
둘째,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고,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수많은 불치 병자를 고치시고  마지막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주인이요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셨다.
 
셋째,어두운 세상의 참 빛이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하나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참 빛이시다.
 
또한 요한복음 8장 12 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빛은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더욱 풍성케 한다. 예수님도 그렇다.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도록 에너지를 주는 빛이 되어 주신다. 그 예수님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계신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즉시 사라진다. 여러분 속에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을 믿는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모든 어둠을 물리쳐주실 것을 믿는다. 이 빛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시며,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이시며,빛 되신 하나님이시자,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이시다. 그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 빛을 주시는 줄 믿는다.
 
<오늘의기도  >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도 빛되신 주님따라 빛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성진목사 / 풀향기교회


금-부활이요 생명이니
본문: 요한복음:11:25-26
찬송가: 160장

이사야 22장의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향락적인 삶에 빠져있던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 신앙이 없으면 믿음은 헛되다. 현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두 가지 사실이다(히9:27)." 
 
우리는 모르는 것이 셋,아는 것이 셋이 있다. 모르는 것 세 가지는 언제 죽을지,어디서 죽을지,어떻게 죽을지이며 알 수 있는 세 가지는 반드시 한번은 죽는 것이며,아무도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이요,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신다.
 
첫째,믿음을 주시기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흔들림없는 견고한 신앙을 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1장 4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내가 부족할지라도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가질 때 부활신앙이 되며,능력 있는 믿음이 된다.
 
노아에게 큰 믿음을 주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큰 믿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을 통해 하나님은 큰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
 
둘째,생명을 주기 원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생명을 얻게 한다. 에스겔 37장 10절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보니 뼈들이 변하여 엄청난 군대가 되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말라 빠진 뼈들과 같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채찍으로 치셨지만 저들을 버리기를 원지 않으셨다. 마른 뼈로 숨쉬게 하는 생명의 회복을 주시기 원하셨다.
 
셋째,부활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 부활은 삼위의 하나님이 온 우주를 장악하고 계심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다. 본문에서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장사한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샘솟는 기쁨이 있게 된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자녀들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변치 않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하며 봉사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홍만목사 / 안민교회


본문: 창세기 22:1-14
토-십자가의 길
찬송: 358장
 
성지순례에서 예수님이 걸으셨다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누구나 그 좁은 언덕길을 실제로 밟을 때 걸음마다 눈물로 회개하게 되고 나를 위하여 땀과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의 골고다 길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요구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그 길을 우리는 어떻게 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리아산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순종의 길이다.
 
아비멜렉과 불가침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평화를 찾고 잠시나마 안정을 누리던 아브라함은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를 말리는 고민과 갈등을 겪은 후,끝내 모든 인간적인 미련과 이성을 이겨내고 마침내 독자 이삭을 죽음의 번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세상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과 같은 가혹한 연단을 받았을까? 세상 어떤 강철이 이런 뜨거운 불도가니에서 제련되었을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심하게 반발하며 불같은 분노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고 고통스런 흑암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었을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자 순종의 길에 나섰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산으로 가는 순종,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리고 1천 년 뒤 예수님께서도 이곳 모리아 산의 갈보리 언덕에서 인류의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이 구원을 이룬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불신앙이며,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신앙이다.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괴로우나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신앙의 길이다.
 
둘째,인간의 헌신과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길이다.
 
아들을 짐승처럼 희생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 앞세우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피눈물을 속으로 터뜨리며 올랐을까? 아브라함의 행위는 인간 최고의 헌신과 희생의 절정이다. 하지만 이토록 괴로운 고난의 길,고통과 고독과 눈물의 길은 아브라함이 혼자서 걷던 길이 아니다. 이미 이삭 대신 죽을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던 하나님이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는 길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가 계속 감찰하고 있는 길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판단과 이해력으로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은,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의 자세야말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자기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순종적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명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장차 골고다에서 십자가 죽음을 죽으시고 성취하실 구속 사역을 예시해 주셨다. 그러기에 본문의 사건은 신약의 갈보리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오늘도 고통과 고난의 길이지만 나의 십자가를 최선을 다해 지고 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영숙목사 / 예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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