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재회와 6ㆍ25 전쟁

아버지와의 재회와 6ㆍ25 전쟁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03일(화) 11:29
서울에서 나는 아버지를 찾았고 부녀가 정말이지 극적으로 만났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옷매무새와 얼굴 형색에서 매우 초라하고 초췌한 느낌을 받았다. 거칠고 깡마른 아버지의 몰골에서 사업의 실패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사정을 자세히 듣고 보니 실제로 그러했다.
 
2년 전 아버지가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고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실 때 사업자금을 꽤 많이 들고 오셨는데, 동업자를 잘못 만나서 크게 손해 보고 사업에 실패하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여전하셨다. 내 학비를 염려하시며 주머니에 있는 돈을 톡톡 털어 나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얼마 뒤 1949년도에 아버지는 아무래도 어머니를 남한으로 데려와야 하겠다고 하셨다. 그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아버지의 소식이 뚝 끊겼다. 아버지가 아무 탈 없이 고향에 잘 도착하셨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한으로 내려오고자 했던 시도는 성공했는지 전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1950년 6ㆍ25 전쟁이 터졌다. 나는 가족들의 행방이 더욱 궁금하였으나 도무지 생사 여부를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남한으로 넘어 온 지 3년 뒤(1951년) 나보다 훨씬 뒤에 남한으로 넘어 온 동생 연신과 대구에서 눈물겨운 상봉을 했다. 그런데 연신이를 통해서도 아버지의 안부는 전혀 들을 수 없었고 다만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니가 남한으로 간 다음에 어머니가 언니를 그리워하며 날마다 뒷동산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신에게 종종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맹꽁이 같은 너희 언니가 죽었을 것이다. (공산당이 언니에게 총을 들이대면) '예수 안 믿어요'하면 살려 줄 터인데 '예, 예수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서 죽었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 인민군이 남쪽으로 쳐내려왔고, 불과 며칠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때 적지 않은 교인과 교역자가 거리로 뛰쳐나와서 인공기를 흔들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건물 뒤에 몸을 감추고 이 광경을 구경했다. 이런 상황에 불안해진 우리 친구 셋은 우선 몸을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 영등포에 있는 동료 집으로 피신하기로 하고는 무작정 거리고 나왔다.
 
길바닥에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시체가 그득하게 깔려 있었다. 조순덕이 제안했다. "우리가 여기 있다가는 언제 발각되어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서 가는 데까지 가보자." 이때만 해도 아직까지 한강철교가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목적 지점을 수원으로 바꾸었다. 영등포를 지났고 또 오류동을 지났다. 수원에 이르기 전 계수리라는 마을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그냥 그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 동네에 교회 다니는 할머니 집사님이 계셨다. 연세가 일흔이 넘은 노인이셨다. 할머니가 문간방을 내주셔서 거기에 머물게 된 우리는 각각 할머니의 조카 딸, 조카 며느리, 사촌 누이가 되어서 시골 아낙네 행색으로 지냈다. 그런데 이 마을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들이 거의 날마다 와 가족인원을 조사하러 다녔다. 집안에 혹시 가족 이외의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러 다니는 것이었다. 한번은 인민군 대여섯이 호구 조사하러 할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모두 다 함경도 말씨를 사용했다. 할머니와 인민군들이 마당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일하는 척 하면서 힐끔힐끔 그쪽을 주시했다. 할머니는 며칠 전에 이 집으로 온 우리를 그들에게 친척이라 소개했다. 그런데 이때 조순덕이 느닷없이 고향말씨로 무어라 내뱉었다. 함경도 사투리가 나온 것이었다. 인민군들이 "이 간나새끼가 무슨 조카 며느리야?"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채 끌고 나갔다.

이연옥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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