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

4월2~7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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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3월 29일(목) 14:54

월-십자가 증인-여자들!
본  문; 마가복음 15: 37-41
찬송가; 143장
 
마가복음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전면에 등장했던 제자들 대신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방인인 로마 백인대장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본 여자들이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자식들을 제자로 받아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어머니들과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여자들이다.
 
예수님의 직제자들 중 여성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를 펴는 일에 큰 몫을 한 것은 남자들보다 오히려 여자들이었다. 당시의 사회구조 속에서 여자들은 앞에 나설 수 없었고,뒷전에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경제적으로 도왔고(눅 8:3),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눅 23:27),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과 슬픔을 나누었고(마 27:55),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신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곁을 지켰다.
 
열두제자가 십자가 증인이 되지 못한 이유는?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세 번 나오는데 첫째로 베드로의 고백 직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로 끝맺는다. 둘째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셨다. 세번째로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 이 세 번의 수난예고에서 본 수난의 비밀은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서 세상에 왔고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며 살라고 요구했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따르지도 못했다.
 
여인들이 십자가의 증인이 된 이유는?
 
십자가 밑의 여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르며 시중들던 사람들이다. 여기서 '따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르코테오'는 단순히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을 내려 예수님의 활동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이 동사는 제자직으로의 소명과 결단을 나타낸다. 이들은 갈릴리 예수의 활동초기부터 그를 따르며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했던 여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 사용된 또 하나의 동사 '시중들다'는 그리스어로 '디아코네오'이다. 이것은 앞서 수난예언 때 '섬기라'는 예수님의 요구에서 사용된 동사로 음식을 만들고 살림살이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자직의 본질을 가리킨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삶'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순히 '시중들다'가 아니라 부름 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섬김'이라는 제자직의 본질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그대로 따라 살며 더 이상 운명적인,체념적인 섬김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낸 초기 전도부인,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등 많은 여자들이 이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며,오늘도 십자가의 증인이 되고 있다.
 
<오늘의 기도>
수난의 길을 가는 예수여! 자비를 베푸시어 자발적인 섬김의 삶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태효목사 / 성수삼일교회

 


 

화-빛나는 인격                       
본문: 빌립보서 4:4-9
찬송가: 455장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기분과 감정이 오락가락 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온도조절기 같은 사람이다. 환경과 조건에 영향을 받아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상관없이 항상 모든 것을 조절하면서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는다.
 
사도 바울은 환경을 초월하여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가 감옥의 열악함도 육신의 고통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의 원천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자신은 승리자이고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믿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용이란 어떤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영적으로 인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또한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하나님의 위대하신 품성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꿈을 꾸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 모든 문제는 기도 제목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께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맡기고 기도하는 자가 누리는 은총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간절히 당부한다. 그것은 '위대한 신앙 인격자가 되라'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한다. 곧 하나님의 평강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깊은 영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자는 이런 품성을 갖추게 된다. 이런 품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교회가 은혜롭게 되고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샌프란시코신학교에 총장이었던 도널드 맥컬로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빛나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으로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빛나는 인격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빛나는 인격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살아가는 빛나는 인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저희들이 주님의 품성을 본받아 빛나는 신앙의 인격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성품을 온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재현 목사 / 가람교회

 


 

수-성령의 인도받는 고난
골 1:24-29
찬송가: 543

몇 년전 필자의 교회가 네 번째 성전을 건축하면서 태풍을 만났다. 밤새 불어대는 비 바람은 건축도중의 현장을 서너 차례나 나가 보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런 후 아침이 밝게 열렸고 점심 때쯤 우체부가 편지 한 장을 가져왔다.
 
우리 교회를 평생 지켜 오신 원로장로님이 95세의 나이로 교회를 떠나 아드님 집에 계시면서 필자에게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목사님 고생이 많으시죠? 그러나 목회자는 고난을 짊어지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주님의 나라에 헌신하시며 상급이나 칭찬을 성도에게서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께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짧은 편지였다.
 
원로 장로님의 말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 편지를 받아 읽은 후 전화가 걸려왔는데 장로님께서 이른 아침에 교회에 기도하러 가시다가 경미한 자동차 사고를 당하시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그 편지는 원로장로님의 유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누구나 바른 주님의 종이라면 주님이 마지막 지고 가시던 골고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오르던 구레네 시몬처럼 우리의 삶은 남겨진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육신이 살아 있어서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하고 오해받으면 해명하고 싶어 한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사도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자신은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낳아 키우면서 부모로서 대접받기 보다는 고난을 감내하듯 바울사도는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워간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름받은 일꾼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각 사람을 양육 하는 데는 희생이 없으면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사명은 세상을 가시적인 교회화 시키는 데 있기 보다 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하고 희생을 통한 밀알정신이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동의 장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세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최근 탈북자들의 북송 문제가 크게 보도되고 있다. 이념논쟁을 떠나 한 사람의 고통과 죽음에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는 것 같다.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비 인간화된 제도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바울사도는 29절에서도 바울 사도 자신의 일은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거한 모든 일과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곤란하다. 사람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지만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며 도와 주실 때 우리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사는 길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진다.
 
<오늘의 기도>
주님 이 사순절기간에 고통받고 있는 북녘동포나 물부족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세계 도처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돕게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김정기목사 / 조수교회

 


 

목-신발을 벗는 가정
출애굽기 3:1-12
찬송가: 430장
 
오늘은 모세가 출애굽 사건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순간과 하나님께서 모세의 신을 벗기신 사건을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신발을 벗는 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애굽의 왕자로 성장했던 모세는,나이 40이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된다. 결국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40년 간 장인의 양떼를 돌보며 산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지 않는 나무가 아니라, 태우지 않는 불을 보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이 들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왜 하나님께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는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 들어와서 당신의 임재를 느끼라는 것이다.
 
둘째,사명을 받은 자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고자 하셨다. 고통 받고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 낼 사명이었다. 그런데 더 튼튼하고 좋은 신을 신기지 않으시고,오히려 그가 신은 신마저 벗기셨다. 신은 모세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도구였다. 신발은 자기 의지,경험,지식,철학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엔 세상의 신,오만의 신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는 정 반대의 신도 벗어야 한다. 모세의 광야 40년간의 생활은 절망과 좌절의 기간이었다. 그러한 지나친 자기비하,절망,고독,원망의 신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는 다 벗어야 한다.
 
셋째,신을 벗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신을 벗어 맨발이 된 모세에게 비로소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라고 사명을 주셨다. 그러자 모세는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의 대답이다. 사람이 자기를 모를 때에는 "나는 누구다" "나는 아무개다" "내가 누군데 감히…"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알게 되면 "내가 누구기에?"라고 말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모세에게,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질문하는 모세에게,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때이다.
 
평안의 복음의 신(엡 6:15)을 신고,주님과 함께 걷게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의 것을 버리지 못한 자에게도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십자가의 공로로 새로운 자가 되었으니 나의 신발을 벗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석일목사 / 온누리교회

 


 

금-예배 그리고 찬양
찬송가 : 31장
말씀 : 대상 16:4-6
 
유대인들은 예배를 '샤하' 혹은 '아바브드'라고 한다. 샤하는 엎드린다. 아바브드는 섬긴다는 뜻이 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굴복,순종,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예배에 언제부터 찬양이 도입되었는지 궁금하다.
 
첫째,예배에 음악이 등장하게 된 최초의 기록은 출애굽기 15장에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 배 한 척 없이 홍해를 건넌 후 도하 감사 예배를 드릴 때 온 백성이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렸다. 이 때 불렀던 찬양은 누가 작사 작곡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예배심,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본래의 종교심에서 자연적으로 발로된 것이다.
 
둘째,모세를 통하여 율법으로 규정한다.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은 나팔을 불어 그 제물 위에 울려 퍼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예배에 찬양이 등장하게 된 법적 근거라 본다.
 
셋째,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왕정을 펴게 된다. 다윗 임금은 이를 보충하여 제도화 시킨다. 아론의 직계 자손 레위인을 세 반으로 나누어 제 1반은 제사장을 수종들게 하고,제 2반은 찬양 대원이 되게 하고,제 3반은 성전문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찬양이 신약 교회까지 이어진 것은 이런 역사적 근거가 있는 유산이라 본다.
 
우리들은 예배에 찬양의 위치와 중요성을 깨닫게 바른 인식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첫째,찬송을 부를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기도가 찬양이 되어 드려져야 한다.
 
둘째,힘을 다하여 불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라는 말씀과 같이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옛 신의주제일교회의 찬양 소리는 오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 돌리는 찬양이 무기력하면 안된다. 마귀세력이 혼비백산 하도록 힘을 다하여 불러야 한다.
 
셋째,아름답게 불러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듣는 자들에겐 은혜가 되고 본인에게는 감격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찬양대원들에게 몇 가지 당부하고 싶다.
 
첫째,사명감이다. 찬양대 존재 이유는 구약시대 레위인으로 조직되었던 찬양대 계통을 이어받아 예배의식을 아름답게 하고 찬양 수준을 높이고 바로 부르기에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성가대원은 온 회중과 함께 예배자 중 한 사람이다.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읽고 헌금하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할 수 있는 성직의 긍지로 여겨 온 교우들에게 예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찬송하는 표정만 봐도 은혜가 되도록 하며 예의범절에 신경을 쓴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더욱 빛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찬양 드리는 자신에겐 은혜가 되게 하옵소서. 형식적으로 부르는 찬양이 아닌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는 찬양이 되길 소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창희목사 / 함양교회

 


 

토-명품신앙
본문: 민수기14:4~8
찬송가: 302장

노랗다고 다 금이 아니다. 반짝인다고 다 보석이 아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은 다 수준이 있고, 급수가 있다.
 
물(1.2.3급수),호텔,바둑,태권도,심지어는 공무원도 급수가 있듯이 물건에도 명품이 있고,짝퉁이 있다.
명품은 유행을 초월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값이 나간다.
 
그렇다면 명품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첫째,감정을 통한다.
 
세상에는 가짜가 너무 많다. 꿀,기름,녹용,학위,진단서,의사,경찰,수표,목사까지도 가짜가 판을 친다. 그 외에도 시계,가방,옷,보기에는 진짜 같아도 감정하면 다 드러난다.
 
우리 눈에는 올챙이가 비단개구리인지,참개구리인지 구분 안 되도,병아리가 장 닭인지,암 닭인지 분간 못해도 감정사의 감정으로 금방 구분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내가 잘 믿는다고 소리치며 교만해서는 안 된다. 말씀으로 감정해봐야 된다.
 
둘째,명품은 만들어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라 해도 땅속에 묻혀있으면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 돌이 상품 가치를 나타내려면 반드시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고 가공되어야 한다. 원석이 그냥 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명품은 그 분야에 미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림도 작품도 물건도 열정이 없는 사람은 명품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다.
사도행전 26장 24절을 보면 바울은 선교의 명품 사역자가 되기까지 예수님에게 미쳤다.
 
셋째,최고의 감정사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누구에게 인정받느냐가 중요하다. 감독에게 인정받는 선수는 결국 스타가 된다.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학생은 점점 성적이 올라간다. 주님께 인정받는 성도는 명품신앙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 보고로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하게 했으나,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 보고를 하여 명품신앙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들은 장애물보다 가나안을 보았고,사람보다 하나님을 보았으며, 현재보다 미래를 보았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팥죽을 보는 신앙과 장자권을 보는 신앙의 차이이다.
 
물건을 살 때 나라별로 특징이 있다. 독일 사람들은 오래가느냐를 묻고,프랑스 사람들은 유행하느냐, 유행이 지났느냐를 묻고,미국사람들은 싸냐,비싸냐를 묻고,한국 사람들은 진짜냐,가짜냐를 묻는다.
 
결론적으로 돌도 위대한 조각가를 만나면 작품이 되고,흐르는 물도 언덕을 만나면 폭포가 되듯이,우리의 인생과 가정도 예수님을 만나 명품인생으로 값지게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우리 신앙이 명품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사랑하며,복음을 위해 사명을 다하는 주의 종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명운목사 / 항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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