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다시 살려면 고난의 길 걸어라

교회여,다시 살려면 고난의 길 걸어라

[ 사설 ] 사설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27일(화) 16:05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고난을 되돌아보고 십자가의 고난 뒤에 있을 부활의 기쁨을 기다리는 고난주간이 다가왔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고난이라는 의미를 놓칠 때가 많았다. 고난 보다는 오히려 축복과 부흥이라는 단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올해도 우리에게 또 다시 고난주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동안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고난을 보다 심화시킬 뿐 아니라 확장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시대에 '채찍질고행자'라고 불리던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금요일 정오가 되면 도시의 광장 분수대에 모여 웃옷을 벗은 채로 자신들의 몸을 채찍질하고,심지어는 칼로 자해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은 스스로 몸에 해를 가할 정도로 자신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 경건한 사람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니 그들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을 추구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약간의 고생은 있겠지만,고난은 분명히 너무 생소한 단어가 되었다. 고난은 생소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은혜를 끼친다든가,부흥운동이란 말은 가능하지만,고난을 끼친다든가,고난운동이란 말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에,교회의 신앙에,프로그램에,선교정책에,목회자상 정립에,신앙목표 설정에 고난을 심화시키고 확장해야 할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 고난이 옅어지면서,혹은 변질되면서 기독교다움도 사라지고,그리스도인의 존재도 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설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는 고난을 부활시키는 데 달려 있다. 이 고난이 일제나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다가왔던 과거의 고난과 같은 외부적 고난이 아니라,주님을 사랑하고 닮기 위한 데서 비롯되는,우리 스스로 자원하는 고난이길 기대할 뿐이다. 우리 스스로 고난을 택하지 않을 때 주님은 외부적 고난을 부과하실 것이고,그 때의 슬픔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한국교회여,그대는 어찌 고난의 길을 걷고자 하는가?,그리하여 다시 살고자 하는가?" 올 고난주간에 다시 한 번 마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