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南)으로 가는 길

남(南)으로 가는 길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가득한옥합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26일(월) 16:14
조순덕,김진실,그리고 나는 남한으로 가기로 했다. 김진실은 황해도 출신이며 조순덕과 동급생이고 나보다 두세 살 위였다. 우리 셋은 거사를 위해 특별기도회를 갖고 남한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기차와 배를 타고 개성까지 가는데 셋이서 함께 타는 것이 아니라 따로 타서 추후 열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순덕이 시골 아낙네로 변항하고서 기차로 겸이포에 도착하면,내가 겸이포에서 그 기차에 올라타고,그 다음 김진실은 사리원에서 그 기차를 타고 장연까지 가기로 했다. 장연에서 한밤 중에 배로 해주를 거쳐 개성으로 넘어가는 노정이었다. 평양신학교를 한 학기 다닌 후 1948년 6월 말(혹은 7월 초순)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한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기약없이 떠나가는 딸의 장래가 염려되고 또 어쩌면 모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기에 어머니는 계속 우시기만 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어머니와의 이별 준비를 담담하게 진행했다. 우리 동네에는 평소에 나를 지극히 아끼는 여자 집사님이 계셨다. 이분의 나이가 50세 안팎이었고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 내가 이분을 찾아가서 기도 부탁을 드렸다. "집사님,우리가 남한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 집사님이 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다. 나도 홑이불 하나 가지고 밤중에 교회로 가서 집사님 곁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밤새 기도하신 집사님이 아침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선생 걱정하지 마시고 넘어가라.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커다란 날개 달린 새가 보이고 그 날개 아래로 네 사람이 자박자박 걸어서 걸너 가더라. 그런데 이 선생,세 사람인가 네 사람인가?" "셋입니다." "나는 분명히 네 사람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주님이시겠죠."
 
드디어 우리가 약속한 날이 밝았다. 겸이포에서 기차를 탔는데 먼저 그 기차를 타고 오는 조순덕을 만났다. 기차가 사리원에 도착했고 김진실이 올라타는데 낯선 사람 하나가 뒤따라 오는 것 아닌가. "저 사람은 누구야?" 그는 김진실의 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다. 동생이 언니를 따라가겠다고 기어코 나서기에 뿌리치지 못하고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네 사람이 되었다. 집사님이 환상으로 본 네 사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정된 노정을 따라 무사히 서울로 들어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남한으로 보내시는데 조순덕전도사를 사용하셨고,또 내가 남한으로 가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김순호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우리는 이제 막 새로 시작된 남산의 장로회신학교에 등록했다. 사실 나는 신학교보다는 일반대학에 다니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나는 전도사 교역에 대한 사명감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때 또 한번 조순덕이 내 손을 무조건 잡아 당기다시피 신학교로 인도했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코가 꿰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순덕과 김진실은 별과에 등록했고 나는 본과에 등록했다. 별과는 3년 과정이었고 본과는 5년 과정이었다. 나는 두 사람보다 2년 더 공부해야 했다. 여기에서 그들과 나 사리에 입장이 확연하게 나뉘었다. 두 사람은 얼른 교회로 가서 교역자로 일하고 싶었고,나는 신학을 깊이 배우고자 했다. 본과에서 나는 성서고전어를 배우느라 죽을 고생했다. 영어도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로 열심히 배웠으며,일반 교양과목(경제학 등)도 배웠다. 그때 교수진이 박형룡,권세열 등이었다. 우리는 신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남학생 기숙사는 신광교회 곁에 있었고,여학생 기숙사는 남학생 기숙사 근처의 적산가옥에 마련됐다. 여학생의 수가 불과 몇 명이 안됐기 때문에 여 기숙사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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