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17일

3월12~17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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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3월 07일(수) 15:42

월-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본문: 마가복음 14:32-42 
찬송가: 342장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고난을 피하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 사는 한 고난은 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께도 고난이 있었다. 가장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인의 누명을 쓰셨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았다.예수님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고난이 다가올 때 피하지 않으셨다. 고난을 이기셨다. 고난을 통해 더 큰 영광과 사명으로 전진하셨다.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이기는 것이다. 쇠는 자꾸 쳐야 강해진다. 용광로에 들어가야 정금이 나온다. 이 시간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에 대해 알아 보고,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자.
 
첫째,가족과 함께 고난을 이겨 나가는 가정.
 
고난을 당할 때 가까운 사람과 동행해야 한다. 부끄럽다고 혼자 있으면 안된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과 함께 했다. 함께 가자고 강하게 요청하신다(막 14:37).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은 고난을 이기는 힘이다. 뿐만 아니라,우리 자신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고,함께 기도해 줘야 한다. 혹시 세상 사람이 다 떠나도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가까이 와 계신다.
 
둘째,기도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가정.
 
기도는 고난을 이기는 힘이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 더 기도하셨다. 세 번 기도하셨다. 최소한 세 시간을 넘게 기도하셨다. 땀이 핏방울처럼 될 만큼 기도하셨다. 끝까지 기도하셨다. 기도하면,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고난이 깊을수록 더 깊게 기도와 동행하자.
 
셋째,하나님의 소원대로 사는 가정.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어떤 고난이든,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담겨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모르는 것이다. 그 뜻을 수용하기 싫은 것이다. 고난이 유익임을 생각하고 견뎌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것이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설교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소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도 중에 주시는 확신을 통해 하나님의 소원대로 살아야 한다.
 
고난 중이라고 해서 흐트러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더욱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하나님 소원을 확인했기 때문에 당당하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소원도 크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영광으로 빛나게 하신다. 어떤 고난이 와도 우리의 삶은 존귀와 영광으로 빛난다(벧전 1:6, 7).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모든 고난을 가족과 함께 이겨 나가게 하시옵소서. 기도로 이겨 나가게 하시고,하나님의 소원대로 사는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석일목사 / 온누리교회


화-시작하는 사람
본문 : 창 12:1
찬송가 : 552장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시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하려면 다음 세 가지 요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꿈과 이상이 있어야 한다. 둘째 창의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희생과 결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마다 생각은 있고 말은 하면서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상 3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일.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실천한 사람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시작하는 사람으로 세우셨기 때문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거기에 수반되는 창조적 지혜와 본토 아비 집을 과감하게 떠나는 용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시작하는 사람이 되자. 남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그늘 밑에서 힘도 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무사 안일주의는 신앙인의 모습은 아니다. 또는 자신이 원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남의 눈치나 보는 타산주의자,기회주의자들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지 모르나 역사의 주인공은 못되고 영원히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서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 호출되어 가나안 땅으로 건너와서 이스라엘을 시작한 인물이다. 단순히 한 민족,한 국가를 창업했다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평가하기 보다는 혼합종교 아래 지배를 받던 열방국가 가운데서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의 나라를 개국했다는 종교적 차원에서 존경받아야 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당시 할례는 성별과 헌신의 표시였고 십일조는 청지기 신앙고백으로써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었다. 개인이나 어느 민족이나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창의적인 것은 전혀 없고 남들 흉내만 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점에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시작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무조건 시작만 한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사람만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돈 있고,시간 있고,능력까지 구비했다고 해도 그것이 끼칠 악영향은 전혀 생각지 않고 아무것이나 마구 잡이로 시작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칭송은 고사하고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시작은 하되 아브라함처럼 수직적으로는 종교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공익성이 있어야 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시작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교회에는 유익이요,이웃들에게는 본이 되고 자신에게는 축복이 되는 시작하는 사람이 되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것저것 계산만 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는 소심한 사람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시작하되 지탄 받는 일이 아닌 옳은 일들을 시작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창희목사 / 함양교회


수-성장
본문: 골2:6~7,
찬송가: 400장
 
잡초는 그냥 두어도 잘 자라지만 곡식은 가꾸어야 한다. 묘목이 돌아서서 거목이 되지 않고,도토리가 하룻밤 사이에 상수리나무 되지 않듯이 모든 생명체는 다 자라야 한다. 곡식도 자라야 꽃이 피며 열매를 맺고,사람도 성장해야 성인이 되고,위인이 되며,영웅이 된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도 성장해야 된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우리가 다 자라고,성장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새봄과 함께 만물이 약동하여 자라나는 것처럼 교회도 성장하고,가정도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신앙적으로,인격적으로,윤리적으로 많은 성장을 가져오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다.

첫째,예수 안에 행하라(6절).
 
'안에'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게 되며,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는 자유롭고,우산 속에 있는 나그네는 비가와도 걱정이 없으며,밤송이 안에 있는 밤알이 잘 익어가듯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행복하다. 때를 따라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공급받는다.
 
"인생은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왔다.
 
어미 새의 날개 아래 있는 새끼 새는 행복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코치 밑에서 훈련을 받아야 메달을 딸 수 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멘토요,코치이시다.
 
둘째, 뿌리를 내리자(7절).
 
'뿌리'는 매우 중요하다. 한 그루 나무도 뿌리를 어디에 내리느냐에 따라 잡목,또는 거목이 된다. 한 채의 건물도 기초가 중요하듯,학생이 공부를 잘 하려면 기초를 잘 다져야 하듯,신앙의 기초 역시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귤나무도 뿌리를 잘못내리면 탱자가 되고 만다. 이 뿌리의 역할을 교회가 하고, 가정이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처럼 예수 안에 뿌리를 박게 되면 시편 1편 3절의 말씀과 같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그 행사가 다 형통케 된다.
 
셋째,굳게 서자(7절).
 
오늘 이 시대가 가정을 위협하는 시대요,교회를 위협하는 시대이다. 사단이 행복한 가정을 무너뜨리고,이단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다. 따라서 믿음이 성장하려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한다.
 
우리 모두는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새봄에 만물이 약동하듯이 우리도 잡초같은 인생으로 살다가 시들지 말고,화초같은 인생을 살며 꽃피고 열매 맺는 멋진 주의 자녀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이 왔습니다. 임진년 이 한 해 동안 교회도 가정도 이 나라도 성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명운목사 / 항도교회


목-달리다굼의 은혜
본문: 마가복은 5;35~43 
찬송가: 472장
 
갈릴리 호수 서쪽에서 이적적 치유사건은 혈루증 치유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와 거라사인의 귀신 축출 기사다. 세 사건들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고,모두 유대의식법상 매우 불결하게 간주됐다. 율법에 따르면 무덤이나 피를 만지거나 죽은 자와 접촉하는 것은 불결한 일로 간주되었다. 당시 불결한 일로 간주되었던 율법(레위기 11장)을 생명을 걸고라도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굳게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요 해석자로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선포하고 계신다.
 
성서에는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되지 않고 원어로 직접 쓰인 몇 가지 말들이 있다. '달리다굼'도 그 당시 상용되던 아람어로 요즘말로는 굿모닝처럼 '아가야 일어나거라'는 말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아침을 깨워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상황에서 아주 조용히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하신다. 오늘 우리는 '달리다굼'의 은혜를 어떻게 임하게 할 수 있을까?
 
첫째,간구해야 한다. 야이로회당장은 당시에 신분과 지위와 부가 보장된 자리다. 그에게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야이로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간절하게 딸을 살려주길 간구한다. '간구'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결코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단지 우리의 믿음이 문제다. 우리는 완전한 절망의 순간에도 참된 희망이신 예수님께 간구해야 한다.
 
둘째,주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하신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장례에는 이처럼 직업적으로 곡하는 사람을 돈으로 사서 피리를 불며 크게 우는 관습이 있었다. 이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지만,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부정했다. 그런데 예수는 고대 아람어와 헤브라이어의 중간 형태로 "탈리타 쿰! 소녀야 네가 너에게 말하는데 일어나라!"고 명하시며,육신의 살아남에 초점을 둔 야이로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포하신다. 그들은 육신적인 것을 구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살려주시는 달리다굼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
 
셋째,일상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신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동정심이 많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한 번의 기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일상성을 회복해야 한다. 육신의 밥과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전인적인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깨우고 계신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일으키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달리다굼!"
 
<오늘의기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시는 주님! 탐욕과 소비주의를 회개하며 지구촌의 모든 정부와 기업이 약육강식의 무한성장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서 모든 생명이 상생의 길을 가도록 달리다굼을 선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태효목사 / 성수삼일교회


금-화목케 하는 직분
본문: 고린도후서 5:16-21
찬송가: 421장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 물질주의 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적 소유의 매력'에 푹 빠져 더 많이 갖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많이 소유할수록 반드시 더욱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미친듯이 달려가 부귀영화와 권세를 거머쥔 후에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삶의 방식'에 집착하는 한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진정 행복해지려면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충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존재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소유에 집착했지만 이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충만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소유욕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서 세상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조장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 속에서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세상에서 화목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자기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그 일이 자신의 삶을 더욱더 충실하게 해주기 때문에 일에 열중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다른 이들에게 적대적이지만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빼앗길 게 없기에 다른 이들에게 친근하다. 지식에 있어서도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더 나은 완성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생각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곧 예수님처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려 희생의 제물이 되며 세상 속에서 자기를 헌신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소유에 집착하며 탐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세상 속에서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재현목사 / 가람교회


토-우리가 받은 능력
본문: 빌립보서 4:13
찬송가: 401장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전자제품처럼 인간은 유능한 존재이지만 전원이 빠져 있거나 배터리가 다 되면 사용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작품인 인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을 때 인간은 바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대개의 아마추어 사용자들은 기계의 20퍼센트 미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함부로 사용하여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약하고 천하여 보이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능력을 받아 새로운 인생으로 쓰임받은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대단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에도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 평생 주를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의 큰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놀라운 설교 장면을 볼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청중에게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능력있는 설교자로 등장한다. 16세기에 동양에 선교를 시작했던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인도에 갔을 때 한 일본 사람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사람을 만든 후 그를 앞세워 일본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과 같다.
 
죄수의 신분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신분으로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새 사람된 사람의 배후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핍박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 새 인생을 살게 된다. 가진 능력 위에 그리스도의 영이 더해짐으로 엄청난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이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모태에서 완벽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다 갖춰 있다. 밭에 채소가 나고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주시고 우리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도 감귤이 익어간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이 완벽한 조건을 앞에 둔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매뉴얼인 성경말씀을 따라 매일 매일 살면 된다. 그리고 주신 능력을 따라 일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아무리 모든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쓰임에 합당하게 살수 없다면 하늘나라에서는 무익한 사람이다그러나 비록 좋은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살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약한자를 들어 존귀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잘 갖춰있어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떠나 살면 하나님 나라에 아무 유익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기목사 / 조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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