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의 '헌신'이 지금의 나를 키웠다

선배들의 '헌신'이 지금의 나를 키웠다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가득한 옥합(3)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1월 13일(금) 15:20

어느 날 영락교회 여전도회에서 나를 여전도회 서울연합회에 총대로 명단을 올렸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부터 총대로서 적극적으로 여전도회의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심하게 짓눌렀다. 나는 당장 새문안교회에서 모이는 여전도회 서울연합회의 총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나는 할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연합회의 임원이신 영락교회 한 권사님께 "교장 업무로 결재가 있는 시간과 총회 모이는 시간이 서로 겹쳐서 참석하기가 어렵겠다"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잠깐 왔다가 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에 총회 자리에 잠깐 참석했다가 눈치껏 살짝 빠져 나오리라 마음 먹었다. 회장의 개회선언과 함께 총회가 시작되었고 총대 출석 호명 시간에 서기가 내 이름을 불러서 "네"라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눈치를 살피며 살금살금 엎드려 뒷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회의장 입구에 영락교회 권사 두 분이(그 중 한 분은 박경희권사님)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분들이 출입구에서 나를 다시 회의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좀 창피한 노릇이었지만 다시 회의장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매우 수동적인 동기에다 아주 소극적인 자세로 여전도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는 여전도회 서울연합회 회장(1970년),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에도 김필례 선생님의 강력한 권유 때문에 다른 마음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 이거 참 큰일 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여전도회 모임에 한 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고 계속 연이어 참석하면서 나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전도회에서 일했던 선배들의 헌신적인 자세와 솔선하는 봉사활동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여전도회의 사업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는 사랑의 손길,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손을 등 뒤에 감추고 남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몸에 배였던 선배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활 형편이 좋은 회원들은 선교헌금을 내기 위하여 이 가방 저 가방에 따로 꼬깃꼬깃 돈을 집어넣어 두었는데,그렇게 모아둔 선교비를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이것 달라 하면 이 가방에서 꺼내 주고,저것 달라 하면 저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바로 이 어른들이 한국교회 여성 지도자들의 모델"이라는 점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선배들 뿐만 아니라 임원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격려하면서 복음전파와 선교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본다. 총무를 비롯하여 사무국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하는 일에 비하여 월급이 너무 박봉이기에 급여를 조금 올리자는 제안을 누군가 꺼내면 오히려 봉급이 인상되면 여전도회의 운영에 타격이 온다며 인상을 반대했다. 세상에 이런 단체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1975년에 내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회장의 나이는 통상 60세 이상이라야 하는데 나는 아직 50세가 되지 않았는데도 그 전통을 깨고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선배들이 나를 키운 것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임원단은 여전도회가 주관하는 강의와 세미나를 나에게 맡겨 주셨고,이 과제를 맡은 나는 한국 교회 여전도회의 역사와 현실에 관해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이런 저런 강의를 통해 여전도회 회원들을 폭넓게 사귈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지나가다 보니 저절로 여전도회의 핵심 회원으로 키워진 나를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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