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길잡이로서 최선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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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세상 ] 창간 맞아 기독공보 사랑한 최창근 정봉덕 장로 만나다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10년 01월 13일(수) 16:25

   
▲ 본보 복간 당시 재정 자립에 앞장섰던 최창근장로와 정봉덕장로.
이 민족과 교회를 묵묵히 지켜온 영욕의 세월 64년. 현존하는 주간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본보가 창간 64주년을 맞아 1970년 복간 당시에 재정 자립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헌신했던 이들을 만났다. 재정 자립을 위해 선뜻 거액을 내놓으셨던 당시 사장 최창근원로장로(영락교회)와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고전분투했던 당시 전무 정봉덕원로장로(염천교회). 

1백년만에 내린 폭설로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힌 길을 따라 최창근장로 부부가 노후를 보내고 있는 양평 자택을 찾았다. 걸음걸이가 불편하지만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새해를 맞아 뜻밖에 가자의 방문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창간 64주년을 맞아 복간 당시에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어 방문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나는 한 일이 없고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기업인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가 본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73년. 총회 기관지로 새출발한 본보가 1964년 공무국 시설 미비로 폐간의 아픔을 겪고 1970년 다시 복간됐을 때, 그는 사장에 취임해 본보의 재정 자립을 위해 진두지휘한 것. 당시 군사정부 시절에 윤전기 시설을 갖춘 신문사만 남겨두고 시설이 미비한 신문사는 문을 닫도록 했던 이유로 폐간의 아픔을 겪었던 본보가 복간 후에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제자리를 잡아가지 못할 때, 해성같이 나타난 이가 최 장로였다.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기업의 사무실을 기독공보가 있던 기독교회관으로 옮길 정도로 기독공보를 사랑했고 재정 자립에 앞장섰다. 

평북 의주에서 장자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사업 실패로 어릴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장남이었던 그는 가정을 이끌어야할 책임도 지워졌다. 어렵게 자립하며 삼원상사를 설립했고 대륙통상을 설립해 원사도매업을 하던 그는 당시에 성공적인 중소기업인으로 우뚝섰다. 그의 역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실업인회를 발족하고 재소자의 교정과 출소자들의 생활안정을 돕기 위해 세진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기도 했다. 군복음화 후원 사업은 그의 생애에 빼놓을 수 없는 사역 가운데 하나로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그가 기업인으로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회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명한 물질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 확실한 사업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한 선교사업일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내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원 소유주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이라는 물질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물질관이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본보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 

복간 당시에 본보의 살림을 맡았던 정봉덕장로의 눈물어린 헌신도 본보의 재정 자립에 한몫을 감당했다. 복간 당시에 총무국장과 전무이사로 본보 회생을 위해 헌신한 그는 전도부 간사로 재직하던 중에 기관지를 재정적으로 자립시키라는 총회의 뜻을 받고 파송을 받다시피 본보에 입사한 인물.
 "입사 당시 4천명의 독자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 3천명이 구독료를 내지 않고 있어 재정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소개한 그는 "입사하자마자 신문에 구독료 관련 광고를 내고 독자에게 일일이 전화를 한 후에 3천명의 독자에게 발송되던 신문을 중지시켰다"고 회고했다. 1972년 총회에서 교회의 재직들은 모두 본보를 볼 것을 결의한 후에 직원들이 각 교회에 홍보를 다니기 시작한 결과 2년만에 3천명의 독자들이 유료독자로 전환됐다는 것. 

본보의 재정 자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기독공보 자립을 위해 수고한 일들이 많다"고 밝힌 최 장로는 "특히 김형남 정세빈 이봉수장로 등은 매년 거액을 지원했다"면서 "기독공보에 대한 이들의 사랑은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일신방직을 운영하던 김형남장로와 대한모방을 운영하던 정세빈 김성섭 이봉수 이광수장로 등 당시에 기업을 운영하던 이들은 당시 50만원에서 30만원의 거액을 내놓았던 것. 

정 장로도 당시 재정 지원에 앞장섰던 인물로 신광교회 오순만장로와 무학교회 김영배장로 등을 빼놓지 않았다. "자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오 장로를 찾았을 때, 즉시 당시 5만원의 거액을 내놓았고 무학교회 김영배장로도 5만원의 거액을 내놓는 등 당시 선뜻 모금에 동참해 줬다"고 당시를 소개했다. 

당시를 회고할 때마다 함께 도움을 줬던 이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거명하던 최 장로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앞으로 기독공보는 일간지가 돼야 한다"며 강조한 후, "우리 나라에는 여러 교단들이 많이 있는데 본보를 통해 여러 교단을 선도해 나가야한다"고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기독공보는 한국교회 교인들과 국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만큼 앞으로도 기독공보가 할 일이 많다"면서 "이사들과 임직원들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본보의 산 증인인 정 장로도 "예전보다 지금에 와서 여러가지 면에서 많이 향상됐다"면서 "기독공보가 홍보 자체도 중요하지만 교단이 바로 가도록 길잡이 역할을 감당해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전국교회와 독자들을 향해 "교회 제직들은 기독공보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면서 "기독공보를 많이 사랑해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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