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 에큐메니칼 운동 있었을까?"

"해방전, 에큐메니칼 운동 있었을까?"

[ 교계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276회 학술발표회서 안교성교수 발제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09년 09월 08일(화) 11:42
"초기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사에 의해 주도됐고 이것은 이식된 기독교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

지난 5일 새문안교회(이수영목사 시무)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한규무) 학술발표회에서 '해방전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특징'을 주제로 발제한 안교성교수(장신대)는 "선교사 기독교가 민족 기독교로 전환돼야 하듯 선교사 에큐메니즘도 민족 에큐메니즘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19세기말과 20세기 전반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양선교운동과 일본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상 본격적인 민족 에큐메니즘의 발전과정은 해방 이후에 발견된다고 볼 수 있다.

   
▲ '해방 전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특징'을 주제로 발제한 안교성교수(中)는 선교사 에큐메니즘과 민족 에큐메니즘의 개념을 구분하고 선교부에 의해 주도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날 미시적 맥락인 서양선교운동을 중심으로 발제한 안교성교수는 선교부에 의해 주도된 초기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용적 에큐메니즘' 혹은 '협력으로서의 에큐메니즘'으로 명명하고 "이러한 형태의 에큐메니즘은 교파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간의 경쟁 외에도 근본적인 한계를 노출했다"고 평했다. 현지인은 참여가 제한되거나 이차적인 역할에 불과했으며 선교사의 지도력 독점 현상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안 교수는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민족교회로 결성된 이후에도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한국 감리교인 윤치호만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한 것을 예로 들며 "20세기 전반에 걸쳐서도 에큐메니칼 운동에 선교사의 지도력은 지속됐다"고 했다.

이밖에도 선교사 에큐메니즘이 관계보다 사역에 치중하면서 토착 기독교인의 현실에 무관심한 측면, 정치사회적인 과제가 항상 토착인만의 우선과제였던 것, 지역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에 의해 초래된 선교부 분열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소수파가 주도하는 운동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은 것 등을 문제점으로 제시했다.

한편 이어진 토론의 시간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대별 특징과 강조점, 용어를 구분하는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서정민교수(연세대)는 "해방전 문서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용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현대 에큐메니즘과의 구분이 요청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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