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순교자기념선교회 '바이블 루트'답사

기획취재/ 순교자기념선교회 '바이블 루트'답사

[ 교계 ]

안홍철
2004년 11월 13일(토) 00:00

현지취재 = 안홍철 부국장대우

 올해로 선교 1백2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 역사는 의미있는 기록을 갖고 있다. 1884년 공식적인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기 이전 최초의 한글 성서가 번역ㆍ출간돼 국내에 반입ㆍ유포됨으로 시작된 것이다. 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회장:김삼환)는 올해 한국선교 1백20주년을 맞아 우리말 성경 번역과 인쇄, 국내 반입ㆍ유포 경로를 따른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경의 길'(Bible route) 순례를 기획하고 2005년 시행에 앞서 지난 1~5일 답사를 마쳤다. 본보 편집부국장 대우 안홍철 목사가 이번 답사에 참가, 동행 취재했다. <편집자 주>


◈ 말씀 길 따라서 대륙으로 가다

"만주 영구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가 1874년, 1876년 두 차례 봉황성 고려문을 방문했다가 조선 상인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조선 상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는 한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79년 3월과 4월, 의주 출신 백홍준과 이응찬이 영구에서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 최초 세례다. 로스는 1881년 9월 심양에 인쇄소를 차리고 이듬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했다. 이것이 최초 한글 성경이다. 이렇게 인쇄된 성경은 백홍준과 서상륜 등 매서인을 통해 압록강 건너 의주로 반입되었고 거기서 남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순교자기념선교회 총무 이응삼 목사를 단장으로 한 답사단 일행 11명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적힌 단 몇 줄의 기록을 들고 우리말 성경의 번역과 인쇄, 반입경로를 찾기 위해 심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1백30여 년 전 벽안의 선교사가 조선에 품은 선교적 열정의 자취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게 한 당시 믿음의 선조들의 흔적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가운데 답사단 일행은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존 로스 목사가 세운 동관교회를 방문했다. 동관교회는 1884년 9월 황해도 솔내에 최초로 한국교회를 세운 서상륜 장로가 세례받고, 한글로 쪽복음 성서번역을 함께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회를 들어서니 이 교회 간경성(干慶成) 장로가 교회 안내와 함께 성경 번역이 이뤄진 문광서원을 소개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존 로스 목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뜻을 계승하여 중국 선교가 아닌 한국 선교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입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로스 목사는 1874년 만주 내륙 여행 중 봉황성 아래 고려문이란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의주 출신 조선 상인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만주에 있는 한국인을 전도하여 자국 선교를 하도록 하는 전략을 폈던 것이죠."

 동관교회는 심양에서 제일 오래된 한족교회로 1881년 로스가 심양으로 진출하면서 예배당을 지었으나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불타 없어졌고 1907년 지금의 예배당을 재건했다. 1915년 로스 목사가 별세하였을 때 이 교회 교인들이 그의 공헌을 기리는 기념 동판을 만들어 예배당 강대상 뒤쪽 벽에 부착하였는데 휘장 안에 가려져 있어서 문화혁명 때 발각되지 않고 남게 되었다고. 그 비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킨 관동의 한 분이시여.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길이 남아 있으리라."

 중국은 공산주의 정권의 반종교 정책으로 교회 관련 유적은 거의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됐다. 더욱이 최근엔 개발이란 명목으로 옛 건물과 주거지를 철거하고 있어 만주에서 교회사 관련 유적을 찾기란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관교회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구 건물 옆에 대형 건물을 신축하고 교세 3만명의 교회로 성장해 방문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게 했다.

 동관교회 오른편에는 로스가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던 문광서원 건물이 남아 있다. 사택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란 안내 표지가 붙어있었다. 건물 내부엔 아무 것도 없고 로스 목사 사진과 방명록 만이 덩그러니 있어 세월의 풍상을 느끼게 했지만 1백30여 년 전 이곳에서 영국선교사와 조선의 젊은이들이 밤을 새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했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다.

 다음날 일찍 답사단은 고려문으로 향했다. 심양에서 단동으로 가는 중 봉성 지역 근처에 고려문이 있었다. 지금은 '변문'(邊門) 혹은 '일면산'(一面山)이라 하는데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흔적을 지우기 위한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이다. 동북공정이란 '동북 변경 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의미하는 말로써 중국 정부는 지난 2002년부터 국경 안에서 이뤄진 모든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북쪽 변경 지역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중국 군인들은 고려문 뒤 산에 있던 고구려 산성도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문 마을은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시골장터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고려문은 옛날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국경 관문이었다. 로스는 이곳에서 이응찬이라는 조선 청년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통해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등과 잇따라 교제하며 심양 문광서원에서 성경 번역을 시작한 것이다. 특히 사역 중에 서상륜을 만나 번역에 박차를 가했고,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1884년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간행했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번역하게 된다. 지금은 일면산으로 지명이 바뀐 고려문에서 당시 로스와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우하는 모습을 오버랩시키면서 고려문을 한국의 복음문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총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편 의주출신 매서인들은 삼양에서 인쇄된 한글 성경을 짐 속에 숨겨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1882년 이성하는 압록강을 통해 의주로 성경을 반입하다 실패, 지니고 있던 성경 모두 압록강에 던져지고 불에 타는 수모를 겪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될 것이요, 불에 탄 성경은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지 않은가?

 일행은 쪽복음이 전하여진 압록강 접경지역인 호산산성(虎山山城)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국정부는 수년 전 호산산성을 쌓은 후 학자들을 동원해 이 산성이 진시왕 때 쌓은 만리장성의 출발점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만주 땅이 옛부터 중국 소유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중국정부의 동북공정 속셈인 것이다.

 호산산성 밑 계곡 사이로 가니 북한 땅이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한·중 국경선 노릇을 하고 있는 뚝방길에서 내려서니 발아래 북한 영토인 우적도(于赤島)가 보이고 그 뒤로 의주가 보였다.

 국경 마을 의주는 복음의 관문이었다. 장사하러 만주에 갔던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최성균, 김진기 등 의주 출신 매서인들은 심양에서 인쇄된 한글 성경을 짐 속에 숨겨 이곳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이성하가 실패한 후 백홍준은 쪽복음을 낱장으로 뜯어서 노끈으로 꼬아 밀반입에 성공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말 성경은 이렇듯 목숨을 건 믿음의 선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약재상을 하던 김청송은 사업에 실패한 후 로스를 만나 식자공으로 일하게 됐고 후에 자기 고향인 집안에 가서 이양자를 비롯하여 집안 일대 28개 골짜기 마을을 돌며 매서인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수 백명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1884년 12월 로스는 이곳 4개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결과 집안을 중심으로 압록강 서쪽 서간도 일대에 한인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거기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복음이 전파됐다.

 1898년 설립된 집안 이양자교회는 만주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라 할 수 있다. 다음날 이양자교회와 김청송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일행은 집안으로 향했다. 집안에 도착해서 조선족교회인 단결교회 장문철 목사로부터 이양자교회 이야기를 듣게됐다.

 장 목사는 1997년 9월 집안 단결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양자교회에 관심을 갖고 그 흔적을 찾아 나섰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무작정 이양자를 찾아가서 노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곳 안마을까지 들어왔더니 85세 된 한족 노인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교당골에 옛날 조선족들이 살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처음 교당골에 가서 수차례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찾았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갈 생각에 개울가에 앉아 얼굴을 씻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건너편 바위에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양자교회 설립을 알리는 기념 표지석이었던 것이다. 그 돌엔 '耶蘇敎 初立 1898 됴선人' 즉, 1898년에 조선인 최초 교회가 설립됐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당장 가 보고 싶었으나 현재 그 바위가 있는 곳은 개인 소유의 땅이 되어 인삼 비닐하우스로 소유주가 통제하고 있어 가볼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됐다. 비록 한인촌이나 예배당 건물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표지석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골짜기를 오가며 성경을 팔았던 김청송의 숨결과 그의 안내를 받으며 세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았던 로스 선교사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단결교회는 김청송을 기념하기위해 교회 옆에 교육관을 청송기념관으로 건립하고 돌비를 세웠다.

 이번 답사팀 단장 이응삼 목사는 "심양에서 시작해 단동, 고려문 의주, 집안으로 이어지는 바이블 루트 순례를 노회원 수련회나 당회원 수련회로 활용한다면 로스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마음 묶어 복음을 전했던 그 열정을 가지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을 다짐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강조하며 전국교회와 노회의 관심을 요청했다.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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