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音의전령사” 54년의역사기독공보주일맞아새로운도약

“福音의전령사” 54년의역사기독공보주일맞아새로운도약

[ 교계 ]

안홍철
2000년 04월 01일(토) 00:00

현존하는 전문신문(주간지) 중 한국 최고(最古)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기독공보가 오는 4월 둘째주일 기독공보 주일을 맞아 새천년,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타블로이드 4면으로 창간된 본보는 한국교회의 유일무이한 신문으로 활약했으며 반세기 세월 동안 운영 주체가 여러번 바뀌고 정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등 영욕의 세월을 거치며 한국교회 대표적인 신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현존 주간지중 최고지령 한국교회는 본래 선교 초기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1897년 감리교에서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창간하고, 두달 후 장로교에서 그리스도 신문을 발행했다. 이후 장로교의 게일 선교사가 그리스도 신문 사장이 되면서 양대 신문을 통합, 그리스도 신문이 됐다.
1907년 예수교 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활동하다가 1910년 종간되고 만다.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기 신문을 발행하다가 1915년 12월 8일 장·감 통합 신문인 기독신보가 발행되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종간돼 한국교회는 언로가 막힌채 암흑기를 맞게 됐다.
일제 시민치하에서 언론이 없는 한국교회는 많은 교역자와 교인들이 피검되고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교회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고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내부적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었고 정치적으론 남북이 각각 나뉘어 강대국들이 주둔하는 한편 정부 수립 문제로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때에 본보의 전신인 기독교공보가 조선기독교남부대회 기관지로 창간되면서 암흑기에 한 줄기 빛을 밝히게된 것
교회암흑기 한줄기 빛으로 기독교공보는 창간사에서 "공보는 조선교회의 公器 이다. 私를 떠나서 公을, 小를 버리고 大를, 邪를 斥하고 正을 따르며 ···· 만인의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닌 公器"라면서 "조선교회의 기관지로서 교회의 혈맥이 되어 上에서 下로, 遠에서 近으로, 산넘고 물건너 교회의 소식을 상세히 샅샅이 알리는 傳令使"가 될 것을 밝혔다.
1948년 토마스선교사 순교기념선교회에서 인수, 제호를 기독공보로 변경했으며 본보는 당시 5월에 있던 총선거를 주일에 실시한다는 발표가 있자 주일 선거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 운동을 주도, 결국 헌정 사상 최초의 선거를 연기시켰다. 1954년 4월 제39회 안동 총회에서 본보를 총회 기관지로 인수했으며 이 시기는 기장과 합동 등 교단 분열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무렵이었는데 본보는 대통합의 입장을 주창하며 에큐메니칼 노선을 견지했다
주일선거 반대운동 앞장 또한 당시 사회 물의를 빚던 전도관과 통일교 등에 대한 이단 사이비성을 폭로하며 사교 집단에 대한 경각심을 계도했다.1966년 9월엔 군사정권에 의해 정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는데 당시 지령은 8백48호였으며 표면적인 정간 이유는 시설 미비였다. 이후 3년 10개월 만인 1970년 7월 31일 한국기독공보란 제호로 복간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보는 복간 이후 지난 30년간 민주화·인권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군부대, 병원, 교도소 등지에 신문을 발송, 활발한 문서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이단 사이비 세력에 제제를 가하다가 피소를 당하는 등 교회 주권 침탈자에 맞서며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왔다
한편 본보와 관련된 총회 결의는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 `총회 산하 각 교회 제직당 본보 1부씩 구독하기로' 한 것과 이듬해인 제57회 총회에서 `세례교인 1백명 이상 교회는 교회 전도비 예산에 군문서전도비를 포함하도록' 한 것, 지난 97년 제82회 총회에서 `4월 둘째 주일을 기독공보주일로 지킬 것' 등이다.
본보는 올해 제3회 기독공보주일을 맞아 전국을 6개권역별로 나눠 전 직원이 참여한 가운데 기독공보주일 예배를 드리고 본보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할 예정이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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