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1999 꿈결처럼 흘러간 한국교회 1百年

1900~1999 꿈결처럼 흘러간 한국교회 1百年

[ 교계 ]

안홍철
1999년 12월 25일(토) 00:00

◈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설교로 시작돼 한반도 전체에 부흥열기를
불러일으킨 평양대부흥운동을 말한다. 그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크나 큰 위세를 떨
쳤다. 여기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수 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 성경공부, 전도활동 등 그리고 주께 바치는 생활에 스스로 힘쓰게 되었
으며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에서 얻은 힘으로 그후 거듭 일어나는 일제 하에서 수난에 박
해를 능히 견디며 참아 나가게 했다. 특히 부흥 사경회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연례적 행사처럼 되었다.

◈ 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노회 창립의 역사적인 막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
는 한국인 장로 36인과 선교사 33인과 안건으로서 1901찬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예
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켰다.

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
수하여 목사로 세웠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케 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등장했다.

◈ 장로회총회 창설

1911년에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에 총회를 조직할 것을 구상하여 그 준비 작업에 몰
두했다. 결국, 독노회 산하의 일곱 대리회가 승격되어 노회의 조직을 보았고 목사 52명, 장
로 1백25명과 선교사 44명 등 2백21명의 회원이 모여 총회가 조직되었다.

◈ 105인 사건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 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치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 당시 인구 2천만 명 중 크리스찬이 18만 명이 넘었다. 7백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
백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백5인 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백5인 사건이
다.

◈ 3.1운동과 교회의 애국활동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
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했다.

◈ 굴욕적인 신사참배 결의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37년 감리교에 이어 1938년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한국
교회의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했다. 그 후에도 일제
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썼다. 평양신학교가 패쇄됐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명의
성직자가 순교했다.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
를 하게 된다.

◈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신사참배를 가결한 다음 해인 1939년 9월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회집한 장로회 제28회 총회
는, 그 자리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소위 시국 선
언문을 채택했다. 1945년 7월 19일 장로회, 감리교, 구세군 그리고 소교파 다섯 군데의 대표
들이 서울 정동교회에서 회집하여 각 교파가 합동하여 `조선교단'을 설립했다. 1945년 8월 1
일에는 이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고 이름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란 명칭은 완전
히 사라졌고 교회는 완전히 유명무실화.

◈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9월 20일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표했다. 한편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
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갔다.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졌다.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웠다. 1959년에 같은 예장
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됐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겨 현재는
예장이란 이름의 교단이 1백여 개나 된다.

◈ 성경 국역 출판사업

1906년에 출간된 신약이나 1911년에 나온 구약의 구역성경은 1937년에 개역신약이 나올 때
까지 한국교회의 유일의 공인 성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현대인
에게 적합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고, 1960년에는 우리 전 세계적인
성경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12월 드디어 새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
다. 1968년 2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77년 부활절을 기하여 공동번역 성경의
완역 간행을 보았다.

◈ 찬송가 출간과 보급

1967년에는 개편찬송가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개편위원회의 구성원으로 된 대한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등에서만 호응을
얻었고 나머지 여러 교단에서는 따로 `새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또는 여전히 합동찬
송가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사정이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 가지의 찬송을 불러 혼잡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불편이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계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국내 20개 교단으로 총망라된 한국찬
송가통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당한 노심 끝에 1978년 가을에 하나의 통일찬송가가 나왔
다.

◈ 70년대 매머드 부흥집회 성황

빌리 그레함 목사는 1973년 5월에 그의 전도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인파를 기록한 집회를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했다. 초교파적으로 열린 이 전도 대회에 마지막 날에는 1백20만명이
모여 들었다. 한국의 부흥사들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77년 민족복음화성회가 1977년 8월 15
일에 역시 여의도 광장에서 막을 올렸다. 한편 이러한 대 전도집회의 성행은 일종의 전시효
과에 지나지 않아 비난의 소리가 높기도 했다.

◈ 70년대 인권 민주화운동

70년대 유신 정권에 가장 극렬하게 항거한 세력은 바로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인권, 사회정
의 등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연유로 인해 상당수 지도자들이 구속, 수감되는 일들이 많았다. 한국교회는 유신헌법
아래서 산업선교와 인권운동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양적 성장도 이루어냈다. 한국교회
보·혁의 각양 은사를 통해 균형있는 발전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
다.

◈ 한국장로교회 백주년기념대회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한지 1백년이 된 한국교회는 하나님 은혜에 감
사하는 한편 백주년 기념선언문을 채택, 선교 2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좌표를 설정했다.


동 선언문은 “선교 2세기를 맞아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제자로서 사회의 도덕 및 영적 가치
향상을 위해 봉사하며 사랑과 진리로 하나되고 민족과 국가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 자주적으
로 참여할 것”을 천명했다.

◈ 단군전 건립 반대운동 확산

85년 서울시가 시비를 들여 사직공원 내에 있는 단군전을 증축하기로 하자 6월 초교파적으
로 단군전 건립 반대 대책위가 조직되고 10월부터 전국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99년 들
어 국공립 학교에 단군상 건립이 추진되면서 한기총을 비롯한 한국교회 전체가 이에 대해
거교회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백주년 기념관 봉헌

한국교회 1백주년을 기념하며 선교 2세기의 새 장을 여는 요람으로 세워진 한국교회백주년
기념관은 연합장로회가 기증한 1천6백평의 대지 위에 총 공비 32억여원을 들여 지하 2층,
지상 6층 3천 35평 규모로 세워졌다. 건물 전체를 한국적인 전통미를 살려 세웠다.

88 선언과 글리온 남북회담

88년 교회협 37회 총회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란 문서를 채택하
자 한국교회 보·혁 교단의 이념적 갈등이 심화됐다.

본교단에선 73회 총회서 △교회협 총대 파송 보류 △선언 무효 △찬성 등 3가지 유형의 헌
의안이 상정돼 1년간 연구키로 했고 이듬해 74회 총회선 선언을 인정치 않기로 하고 채택
당시 총대 전원을 교체하기로 했다.

한편 세계교회협의회 주최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88년 11월 남북교회 대표들이 만나 8.15 직
전주일을 남북이 공동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하였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문을 작성했다.

◈ 90년 JPIC 대회

전세계 1백24개국 1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린 JPIC(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
전)대회는 “지구촌의 마지막 분단국인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희년을 위한 간구와
기도로 지원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JPIC 대회는 전세계교회가 경제정의와 평화, 환경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된 계기가 됐
다.

◈ 시한부종말론 준동

그릇된 성경 해석과 허황된 신비주의로 사회에 만연한 위기의식에 편승해 나타난 시한부 종
말론은 결국 10월 28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으로 `휴거'했다. 이를 계기로 보다 성숙한
성경공부와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94년 여성안수 `전격' 통과

지난 35년 여성 안수가 헌의된지 61년 만인 94년 제79회 노회에서 전격 통과됐다. 총투표수
1천3백21표 중 찬성 7백1표로 반대보다 89표가 많았다. 이에 따라 96년 첫 여성 목사가 탄
생한 이래 99년 현재 77명에 이르고 있다.

◈ 97년 IMF 경제 한파

97년 말부터 불기 시작한 IMF 한파가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종 예산의 삭감, 동결로
이어져 특히 해외 선교가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교회는 과거 일제시대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때 교회 여성들이 앞장서
금반지 모으기 운동을 벌였던 것처럼 거교회적으로 금모으기 및 근검 절약 운동에 앞장섰으
며 실직으로 인한 노숙자를 위한 밥집, 쉼터 등을 운영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
다.

자료 참조 : 한국기독공보,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KCM(한국컴퓨터선교회) 한국기독교
회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 신교 백년(김응호). 정리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