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잇는 "조선사랑" 언더우드家 사람들

代잇는 "조선사랑" 언더우드家 사람들

[ 교계 ]

안홍철
1999년 05월 29일(토) 00:00

한 국교회사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언더우드(元杜尤/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이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한국장로교회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 전도 교육 문서 사업에 전력투구한
벽안(碧眼)의 선교사.

연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본관 앞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두
손을 내밀며 지나가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브론즈 상이 바로 언더우드의 동상이다. 뿐만
아니라 동상 바로 뒤편 현재 연세대 본관으로 사용 중인 석조건물의 이름 또한 언더우드
관’이며 본관 좌측에 위치한 교수 식당(구 신과대학 건물)은 언더우드의 아들인
원한경(元漢慶/Horace Horton Underwood)선교사의 이름을 딴 @한경관’이다.

이처럼 연세대 교정엔 언더우드 가문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언더우드 가문의 흔적은 이런 무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기를 넘기며 언더우드의
후손들이 4대째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원두우 - 원한경 선교사에 이어 현재 연세대학교 상임 이사로 봉직하고 있는
원일한(元一漢/Horace Grant Ⅱ Underwood)장로와 연세대 교수인 그 아들
원한광(元漢光/Horace H. Underwood) 교수가 선조들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언더우드 가의 이러한 한국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1885년 부활절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제물포 항에 언더우드가 첫 발을 내디딤으로 한국 교회사는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푸른 눈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의 4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유명한 과학자요, 발명가로 알려진 부친의
영향을 받아 실용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에서 자란 그는 1872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뉴욕 대학과 뉴 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본래 신학교 재학
시절부터 인도 선교사를 꿈꿔 왔으나 한국에 선교사가 요청된다는 것과 이 요청을 받아들일
선교사가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서울에 입성한 언더우드는 자신보다 1년 먼저 와있던 미국 공사관 공의 알렌을 도와 처음엔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뉴 브런스윅 신학교 재학시절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1년
공부한 터라 병원 일을 돕는 것이 낯설지 않았으나 이것만으로 복음을 전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1886년부터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이것을 확장하여 영신학교를 세웠다. 이 영신학교가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된 것이다. 당시 고아학교 출신 중엔 민족
지도자 김규식 박사가 있다.

언더우드는 처음에는 의료봉사, 고아원 운영, 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직접적인
복음사역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그 결과 1887년 9월 27일 한국인 14명과 함께 새문안교회를
조직했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들고온 선각자였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일본의 압제에 의해 쓰러져 가는 우리 민족을
개화시키고 서구 문물과 접촉하게 한 창구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는 지금 미국 뉴저지주 노스버겐시 소재 그로브 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으나 그의 유해를
최근 한국으로 이장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어디에 묻혀있든 그의
선교정신과 한국 사랑은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다.

언더우드의 한국 사랑은 그 아들 원한경에 의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원한경은 1890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 한국에서 일하다 1951년 한국에 묻힌 파란
눈의 한국인이다. 그는 1912년 연세대에서 영어 강의를 시작한 후부터 평생을 대학
강단에서 헌신했다. 그는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는 한글 뿐 아니라
한문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학을 개척,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는 사냥에 취미가 있었는데 1915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지에 '한국수렵안내’란 논문을
발표했으며 서해와 남해를 항해하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시 활동한 '해도’를 만들었고
'한국의 선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국어 자습서’ '영한사전’ 등
한국에 관한 저서만 수십 종이 된다. 당시 어느 학자가 그만큼 한국학에 관심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원한경은 한국을 잘 알고 한국을 사랑한 지한(知韓)인사였다.

원한경의 이러한 한국 사랑은 그대로 그의 아들 원일한에게 전수되어 또 다른 한국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다. 1917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나 7세때 미국에 건너가 해밀턴 대학과
뉴욕대학원을 마치고 1939년 23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연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원일한 장로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극도로 달해 1941년 강제 추방을
당했다가 해방후 재내한하여 백낙준, 김윤경 박사와 함께 환도이후 학원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오늘의 연세대가 있게 했다.

이러한 교육계의 탁월한 그의 업적에 대해 연세대와 고려대, 한양대에서 각각
명예교육학박사와 법학박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1960년 4.19 이후 총장서리로서
혼란스럽던 학원 정상화를 위해 교수와 학생 간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행정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978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 지금까지 상임 이사로서 변함없이 연세대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성서공회 이사로 연합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한편 원일한의 아들 원한광 교수는 부친이 한국에서 강제 추방된 시절인 1943년에 출생,
3세때 아버지를 따라 내한, 유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71년
연세대 초청 교수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증조부와 조부, 부친의
사역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올해 안식년인 그는 잠시 강단을 떠나 있지만 지금도
한미교육위원회 총무를 맡아 봉사하고 있다.

1백14년 동안 4대에 걸쳐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한국을 섬겨온 언더우드 가의 한국 사랑,
그들은 분명 푸른 눈을 지닌 한국인 이었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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