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열어야 할 이유

귀를 열어야 할 이유

[ 최은의 영화보기 ]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최은
2024년 07월 18일(목) 13:10
1940년 5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1901-1947)는 96만 유대인을 포함한 약 110만 명 학살의 집행자이면서 5남매를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담장 너머로 시체 소각장의 연기가 매일 솟아오르는 수용소 관사에 살면서 루돌프는 수영장과 텃밭과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가꾸었고 때마다 생일파티를 하고 강변에서 가족소풍을 즐기며 밤이면 딸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인류 최대의 야만과 폭력이 자행된 아우슈비츠는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이른바 '꿀보직'의 장소였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거기서 탈취한 다이아몬드와 모피코트, 그리고 생명의 은인 노릇을 하며 누릴 수 있는 공짜 노동력과 전원주택은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에게는 포기하기 어려운 특권이다. 헤트비히 모친이 말하듯, 그녀의 딸이 오랜 꿈을 이룬 그곳은 언뜻 낙원과도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공포와 절멸의 땅 바로 옆이 낙원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영화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지옥을 증명하는 대신 낙원을 의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따라서 카메라는 결코 담장을 넘어 지옥(수용소 내부)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고, 비극의 현장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멀리 소각장의 연기로 화면이 뿌옇게 되었다가 화이트 아웃이 된다든지, 정원의 아름다운 꽃과 꽃술을 클로즈업했다가 화면이 붉게 변하며 레드 아웃되면서 수용소의 비명과 피가 이미지로 남았을 뿐이다.

한편 사운드는 자주 영상과 반대의 분위기로 출몰한다. 소풍중인 회스 가족이 담긴 첫 장면부터 그랬다.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화면은 그림처럼 단정하지만, 새소리 물소리로 시작한 영화의 자연음은 이내 불협화음과 아기 울음소리로 뒤덮인다.

사운드 디자이너 조니 번은 이 영화에 2022년 파리의 시위 현장, 베를린의 지하철이나 함부르크 축구장 같은 곳에서 소음과 목소리들을 채집해서 믹싱한 음향을 사용했다. 사운드를 재현하되 단지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여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역사를 현재화하는 작업이어서 더욱 지혜롭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것으로 영화사에서 오랜 논쟁을 낳았던 <쇼아>(1985)의 윤리적 선택과 고다르의 절망적인 선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다큐멘터리 <쇼아>의 클로드 란츠만은 홀로코스트는 재현될 수 없고 재현된 이미지로 제공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의 거장 장 뤽 고다르는 아우슈비츠의 재현을 포기한 순간 영화의 불꽃은 꺼졌다고 란츠만을 비판했는데, 사려 깊게 고안된 사운드를 통해 글레이저의 영화가 그 꺼진 불꽃을 되살려냈다.

영화가 예외적으로 듣는 사람과 들려주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방식도 새겨둘 일이다. 루돌프와 헤트비히의 평온함은 그들이 아우슈비츠의 절규와 비명에 일찌감치 귀를 닫았기에 가능했다. 아기울음소리나 담장을 넘어오는 어떤 괴성도 무관심과 환상으로 포장된 그들의 일상에 균열을 내지 못한 중에 그들의 낮과 밤이 그토록 다르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독일에서 온 헤트비히의 모친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검은 연기와 비명소리에 불면의 밤을 보낸 그녀는 다음 날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가수면 상태로 밤마다 구석으로 숨어드는 루돌프의 어린 딸도 있다. 루돌프는 아이를 매번 찾아내 동화책을 읽어주며 재운다. 그가 『헨젤과 그레텔』을 읽는 동안 열화상카메라 영상은 한밤중에 강제노역자들을 위해 곳곳에 사과를 숨기고 다니는 폴란드 소녀를 보여준다. 마치 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 빵조각을 길에 뿌리는 그레텔처럼. 영화 말미에 다시 동화와 함께 등장한 소녀는 우연히 누군가 숨겨둔 악보를 발견해 피아노로 연주한다.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작곡한 것으로,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악보였다. 불안과 겁에 잠식당한 딸에게 '악한/평범한' 아빠는 마녀를 물리친 헨젤과 그레텔의 용기를 들려주고 싶었겠으나, 타인의 신음에 반응하고 희망의 노래를 건져낸 폴란드 소녀의 용기야말로 밤을 이긴 시대의 희망이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3년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2024년 오스카 장편국제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유대계 영국인 감독 글레이저는 홀로코스트의 인간성말살을 기억한다면 현재 진행중인 이스라엘 가자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저항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오스카 수상소감으로 남겼다.

어디 이스라엘과 가자 뿐이겠는가. 안타까운 죽음과 울고 있는 이웃의 비명을 외면해야만 유지되는 일상과 평화라면, 그 곳이 곧 우리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최은 영화평론가·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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