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떼는 말이야! ] ②
박창환 목사
2024년 07월 10일(수)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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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국경이 없지만, 종교인은 국경이 있다. 우리는 종교인이기에 하나님과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24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에서 3년 7개월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헤아릴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군에 입대해야 한다. 필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재학 중에 영장이 나와 졸업을 위해 연기 신청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바로 영장이 나와 1966년 2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졸업하고 입대를 했기 때문에 훈련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신앙인으로서 훈련병 생활에 모범적으로 참여하며, 훈련 중 쉬는 시간마다 한적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군 생활 중 군종병으로 선발되어 군인교회를 섬기고 전도하면 좋겠다."
어느 날, 훈련병 교육을 수료한 후 늦은 밤 논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했다. 병력을 인수받기 위해 각급 부대에서 온 트럭 수십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트럭에 탑승 후 배치받은 부대로 이동했는데, 야간이라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필자는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8)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다.
군 트럭에서 하차하니 그날이 주일이었다. 그 부대는 8사단 21연대였다. 보충대 내부에서 군종병이 기독 신자를 인수해 트럭에 태우고 갔는데, 교회가 영외에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다. 예배 시간에 저는 예배당 가장 앞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때 강단에 서 있는 군종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닦고 강단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충북노회 소속 두 분의 군종목사님 중 한 분인 홍영의 군종목사님이셨다. 평소 알고 지냈던 홍 목사님을 만나게 되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홍영의 군종목사님께서 필자에게 "박 전도사, 어떻게 여기에 왔어?"라고 물으시자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갓 부대 배치를 받은 저를 안아주시며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후 월요일에 인사를 나누고, 목사님의 요청으로 군종병으로 명을 받아 가슴에 '군종병' 명찰을 달고 근무했다. 필자는 마음속에 '군종목사'로 임관해 군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 홍영의 군종목사님께서 육군 군종병과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오시며 '군종장교 모집 요강'을 주시며 응모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필자는 병장 계급장을 달고 영락교회에서 진행된 군종장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1967년 2월 7일 충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도 받았다. 그러나 연도별 입대 인원이 연기되면서 그 해에 입소하지 못했다. 이때 홍영의 군종목사님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셨다. 어느 날, 연대장님께서 필자를 불러 "박 병장, 목사 안수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홍영의 군종목사가 전출을 갔으니 그의 군종 활동을 대행하는 게 좋겠어"라며 권유하셨다. 이후 참모 회의에서는 "신앙에는 계급이 없다"며 참모들에게 "병장 박창환 목사에게 잘 협조하라"고 명령했다. 필자는 병장 군목으로서 야간 초소 방문을 주 3회 실시했고, 교회에서 예배도 인도했다. 문제 사병을 상담하고 사고 예방에도 힘썼다. '병장 군목'이라는 별칭으로 사역한 사람이 나 외에 또 누가 있을까를 생각하니 감사의 미소가 지어졌다.
그 후 보병학교 입소 명령을 받고 교육을 마친 후 1968년 6월 22일 군종목사 중위, '육군 군종 22기'로 임관했다. 청주시 변두리 작은 농촌교회 장로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고 군종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족과 함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
장교로 임관 후 필자는 장기 복무를 했다. 매년 후반기에는 현 계급에서 차상급 계급으로 진급 시즌을 맞이하게 되는데 육군 군종병과에서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군종장교 중령 중에서 한 해 1명이 대령으로 진급한다. 군종병과에는 장군이 없고 대령이 최고 계급이다. 올해 육군 군종병과 창설 73주년을 맞이했다. 머지않아 꼭 군종장군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군 생활을 하면서 장병이 있는 곳에는 군종목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군종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인정을 받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필자는 198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육군 병장에서 대령까지 되는 귀한 진급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박창환 목사 /(예) 육군 대령
2024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에서 3년 7개월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헤아릴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군에 입대해야 한다. 필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재학 중에 영장이 나와 졸업을 위해 연기 신청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바로 영장이 나와 1966년 2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졸업하고 입대를 했기 때문에 훈련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신앙인으로서 훈련병 생활에 모범적으로 참여하며, 훈련 중 쉬는 시간마다 한적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군 생활 중 군종병으로 선발되어 군인교회를 섬기고 전도하면 좋겠다."
어느 날, 훈련병 교육을 수료한 후 늦은 밤 논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했다. 병력을 인수받기 위해 각급 부대에서 온 트럭 수십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트럭에 탑승 후 배치받은 부대로 이동했는데, 야간이라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필자는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8)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다.
군 트럭에서 하차하니 그날이 주일이었다. 그 부대는 8사단 21연대였다. 보충대 내부에서 군종병이 기독 신자를 인수해 트럭에 태우고 갔는데, 교회가 영외에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다. 예배 시간에 저는 예배당 가장 앞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때 강단에 서 있는 군종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닦고 강단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충북노회 소속 두 분의 군종목사님 중 한 분인 홍영의 군종목사님이셨다. 평소 알고 지냈던 홍 목사님을 만나게 되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홍영의 군종목사님께서 필자에게 "박 전도사, 어떻게 여기에 왔어?"라고 물으시자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갓 부대 배치를 받은 저를 안아주시며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후 월요일에 인사를 나누고, 목사님의 요청으로 군종병으로 명을 받아 가슴에 '군종병' 명찰을 달고 근무했다. 필자는 마음속에 '군종목사'로 임관해 군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 홍영의 군종목사님께서 육군 군종병과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오시며 '군종장교 모집 요강'을 주시며 응모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필자는 병장 계급장을 달고 영락교회에서 진행된 군종장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1967년 2월 7일 충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도 받았다. 그러나 연도별 입대 인원이 연기되면서 그 해에 입소하지 못했다. 이때 홍영의 군종목사님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셨다. 어느 날, 연대장님께서 필자를 불러 "박 병장, 목사 안수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홍영의 군종목사가 전출을 갔으니 그의 군종 활동을 대행하는 게 좋겠어"라며 권유하셨다. 이후 참모 회의에서는 "신앙에는 계급이 없다"며 참모들에게 "병장 박창환 목사에게 잘 협조하라"고 명령했다. 필자는 병장 군목으로서 야간 초소 방문을 주 3회 실시했고, 교회에서 예배도 인도했다. 문제 사병을 상담하고 사고 예방에도 힘썼다. '병장 군목'이라는 별칭으로 사역한 사람이 나 외에 또 누가 있을까를 생각하니 감사의 미소가 지어졌다.
그 후 보병학교 입소 명령을 받고 교육을 마친 후 1968년 6월 22일 군종목사 중위, '육군 군종 22기'로 임관했다. 청주시 변두리 작은 농촌교회 장로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고 군종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족과 함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
장교로 임관 후 필자는 장기 복무를 했다. 매년 후반기에는 현 계급에서 차상급 계급으로 진급 시즌을 맞이하게 되는데 육군 군종병과에서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군종장교 중령 중에서 한 해 1명이 대령으로 진급한다. 군종병과에는 장군이 없고 대령이 최고 계급이다. 올해 육군 군종병과 창설 73주년을 맞이했다. 머지않아 꼭 군종장군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군 생활을 하면서 장병이 있는 곳에는 군종목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군종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인정을 받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필자는 198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육군 병장에서 대령까지 되는 귀한 진급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박창환 목사 /(예) 육군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