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서거, 그 이후 80년
2024.03.14 15:09

"나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결혼했다"
"고문으로도 나의 조국 사랑을 막을 순 없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여성지식인이자 민족운동가,
독실한 크리스찬, 김마리아의 말입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해
1910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습니다.

유학 5년째인 1919년,
김마리아 선생은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 눈물을 흘리며 연설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2·8독립선언서를 기모노 속에 목숨을 걸고 숨겨 들어와 전국에 배포했는데요,
이는 3·1 독립만세운동의 불씨가 됐습니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3.1 운동의 배후로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죠

이 때의 고문으로 김마리아 선생은 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큰 병을 얻게 됩니다

그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지만
비밀조직의 탄로로 1920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했는데요,

여러 차례의 투옥과 고문에도 김마리아 선생의
애국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병보석 상태에서 이듬해 상해로 탈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를 지내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는데요,

이후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황에스터 등 8명의 옛 동지들과 함께 근화회(槿花會)
즉,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1935년 귀국해 원산의 마르타윌슨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생을 전도사업과 신학발전에 진력했는데요,

이처럼 김마리아 선생의 애국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 이군식 목사 / 정신학원 전 이사장] - 김마리아 서거 80주기 행사 中

3.1 만세운동 역시 당초 주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주일성수를 하려는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토요일에 거사가 진행됐다고 하죠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시절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제7대에서 10대까지 회장을 역임했는데요,

여전도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다음해로 미뤄
신사참배를 모면하기도 했고,
이듬해 기념행사도 정식으로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며 신앙을 지킨 일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주고 있죠

하지만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해
다음해 3월 13일, 고대하던 조국 광복을 단 1년 남긴 채
평양기독병원에서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강하에 담기어 한 줌의 재가 되리라"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 후 평양 대동강 물에 뿌려졌고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한편, 순국열사 김마리아 서거 80주기를 맞아
이를 기념하는 추모 예배가
그가 교사로 몸담았던 정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후배들이 함께 모여 선배인 김마리아 선생을 추모하며
그 뜻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김마리아 10명이 있었으면 우리는 독립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을 만큼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마리아 선생.

그가 떠난 지 80년이 흘렀지만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애국정신은
변함없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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