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전도·선교운동을 민족운동으로 |2019. 04.30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완> 11. 정재면 <3> 민족독립운동가·교육자·목회자

연해주, 상해, 북간도 전 지역을 순회하며 독립전쟁 현장에서 활동하던 정재면 전도사는 일제의 간도출병 이후 용정으로 돌아와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영국조계지 용정에 캐나다장로교선교부가 세운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는 그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정신 아래 명동학교의 전통을 이어 민족혼을 교육하는 기독교민족주의 학교였다. 은진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교사로 봉직했고,…

전도사로 북간도 3.1운동 주도 |2019. 04.2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1. 정재면 <2> 용정을 기독교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1909년 명동학교에 부임하여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규암 김약연에게 복음을 전한 정재면은 이후 그와 함께 북간도 명동, 용정을 기독교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어 갔다. 정재면과 규암에게 복음전도와 신앙고백은 철저히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학교 학생, 명동교회 교인, 명동촌의 주민들 중심으로 기독전도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했으며, 기독교계 학교를…

북간도 복음화의 일등공신, 교사 정재면 |2019. 04.1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1. 정재면 <1> 간도의 민족지도자 김약연에게 복음 전하다

북간도에 세워진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인 명동(明東).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는 뜻의 북간도 제1촌인 명동의 개척자는 김약연이다. 그는 이곳에서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기독교 이상촌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으로 고난에 빠진 민족의 운명을 세울 인재를 기르는데 한 평생을 바쳤다. 김약연은 이웃 용정에 이상설이 1906년에 설립한 서전서숙이 이듬해 폐교되자, 명동에 자…

"나의 행동이 나의 유서이다" |2019. 04.09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0. 김약연 <2>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규암 김약연의 삶은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그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책만 읽고 행동을 하지 않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그는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근대교육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또한 그는 서당과 학교 밖 세계를 모르는 샌님은 아니었다. 그는 함께 북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거주지 명동촌을 이상적 공동체로 만들고자 애쓴 사회운동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을에만 관심을 갖고 조국…

기독교학교가 된 '명동학교' |2019. 04.0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0. 김약연 <1> 간도의 민족 지도자

나라가 기울어져가던 구한말 한반도 너머 미개척의 땅 간도에서 마을을 일구며 민족정신을 되살려 조국의 등불을 밝히고자 했던 규암 김약연선생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규암 김약연은 186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무관의 집안에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이북 출신 선비들을 관직에 잘 등용시키지 않던 시대적 불합리와 매관매직의 성행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 등을 목도한…

장로교 여성들, 신사참배 거부하고 신앙 지켜 |2019. 03.2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9. 김필례 <3>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재건

1938년 한국 장로교회 교단총회(제27회)는 일제의 집요한 신사참배강요를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총회를 굴복시킨 일제는 전국의 교회를 강제로 통폐합시켰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개신교를 일본 교단에 편입시킴으로써 한국교회를 해체시켰다. 1943년 5월에 한국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칭되었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교파들이…

걸출한 여성 지도력 발휘 |2019. 03.19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9. 김필례 <2> 교회·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

광주의 3.1운동은 양림리(광주군 효천면, 현재 호남신학대학 근처)에 거주하는 외국인(미국) 선교사들, 최흥종 장로, 김필례와 김함라 등 국제정세에 밝은 교회지도자들이 청년들과 자주 모여서 독립운동의 기운을 북돋우는 가운데서 일어났다. 청년들은 '삼합양조장'이란 간판을 달아놓고 주로 밤에 모였다. 광주 독립만세시위의 불씨는 외부로부터 전해졌다. 일본 동경 2.8독립선언서가 정광호와 김마리아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희생의 삶 |2019. 03.1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9. 김필례 <1> 金弼禮, 1891-1983

김필례(金弼禮, 1891-1983)는 1891년 12월 19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贍)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김필순의 누이동생이고 김순애의 동생이며, 또 김마리아의 고모이다. 이들은 모두 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희생의 삶을 살았다. 황해도 소래교회 첫 세대 교인인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난 김…

중국·일본서 존경하는 평화주의자 |2019. 03.0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8. 안중근 <3>숨겨진 이야기-그에 관한 오해와 진실

안중근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존경받는 평화주의자이며 선각자다. 그에 관한 수많은 일화 중에서 특히 백범 김구와의 관계 및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만남 1876년생 김구(金九)와 1879년생 안중근은 대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황해도 출신인데다…

"2천만 동포가 분발해…자유·독립 회복하라" |2019. 02.2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8. 안중근 <2>유언과 유묵에 나타난 교육사상

거사 후 안중근은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뤼순에 있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 재판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안중근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

일제의 심장을 쏜 영원한 대한인(大韓人) |2019. 02.19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8. 안중근 <1> 세례명 도마, 삼흥학교 설립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 마리아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 씨 집안은 원래 향리(鄕吏) 신분이었지만 조부가 미곡상으로 사업에 성공하여 3천 석 지기의 대지주가 되었다. 부친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였으나 전통적 유생의 자리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다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낙향하게 되었고 이로 인…

조국의 독립 위해 '공공책임'의 지도력 발휘 |2019. 02.1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7. 김마리아 <3> 여성들의 실력양성·연대에 평생을 힘쓰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잃은 김마리아는 삼촌 김윤오와 김필순의 보살핌으로 고향 황해도 소래를 떠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마리아와 함께 했던 삼촌들과 고모들은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큰 삼촌 김윤오는 세브란스병원 앞에 '김형제 상회'를 거점으로 1906년 10월 평안도, 황해도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애국계몽단체 '서우학회'를 창립하여 이끌었고, 작은 삼촌…

"조선사람 독립운동 당연, 여자 못할 이유 있소?" |2019. 02.01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7. 김마리아 <2>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망으로 재조직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유학할 때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여 조직을 규모있게 발전시켰으며, 또한 이 조직을 바탕으로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어 국내에서 여성지도자 반열에 곧바로 오를 수 있었다. 여성 지도자로 그녀는 곧바로 3.1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 수감되어 갖은 옥고를 겪고도 김마리아의 독립에 대한 희망은 꺾이지 않았다. 1919년 8월 4…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 |2019. 01.2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7. 김마리아 <1>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의 생애

3.1만세 운동이 나이, 성별, 종교를 뛰어넘어 온 민족이 전국에서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인원을 동원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소통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 헌병대의 1919년 말 조사에 따르면, 만세운동 관련 기소피고인 총 19,525명 중 개신교인이 3,426명으로 전체 17.6%에 이른다. 특히 여성 피검자 총…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다 |2019. 01.15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6. 안창호 <3> 통합의 리더십 발휘

"남에게 정복당한 백성을 노예라 하며, 전제정치에 눌리운 백성을 신복(臣僕)이라 하며 입헌 군주국 백성을 신민(臣民)이라 하며 공화민주국 백성을 인민(人民)이라 하나니. 입헌과 공화를 물론하고 그 백성의 공론으로 그 나라 정치를 행하는 자라야 이를 국민이라 하느니라."(국민설, 신한민보 1909년 11월 17일)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에 실린 안창호의 논설이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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