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라 신드롬,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식어가는 현실

전해라 신드롬,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식어가는 현실

[ 기고 ]

박상기 목사
2016년 01월 20일(수) 10:36

요즘 '전해라'가 유행이다. "공부한다고 전해라" "여행 간다고 전해라" "재촉 말라고 전해라" …뭐 웬만한 상황에 '전해라'만 붙이면 소통이 유쾌하게 될 만큼 열풍을 일으키고 온갖 패러디가 쏟아지고 있다. 이 말은 이애란 이라는 무명 가수가 부른 '백세인생'이라는 노랫말로부터 시작 되었는데 이애란씨는 이 노래로 25년 무명 시절을 한방에 날려버렸다고 하고 출연료는 6배가 뛰고 카카오 이모티콘 판매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왜, 이 노래가 순식간에 온 나라를 점령해 버리고 말았을까? 아마도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과 당돌함이 주는 통쾌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노랫말을 통해 시원스럽게 분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저승사자한테까지 타박을 놓을 수 있는 당돌함이 소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뭔지 모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말이다. 건강과 장수로 대변할 수 있는 소위 백세시대와 그 어떤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고 싶은 정서적 현상이 전통적인 리듬이 주는 중독성과 맞물려 그렇게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을 그저 하나의 신드롬이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분별없이 따라 부르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부분이 있어서 집고 넘어가야할 필요를 느낀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분석해볼 때 가사내용이 성경적 내세관과는 전혀 배치된 것이어서 이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함을 느낀다. 노랫말을 통해서만 보면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는 '염라대왕'이며 세상에서 사람의 명(命)을 거둬가는 이가 '저승사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염라대왕이 60세가 된 사람에게 저승사자를 보내서 오라고 하면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며 당돌하게 저승사자를 타박해서 보낸다는 얘기다. 참으로 우쭐해질 만큼 통쾌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며 인간은 그렇게 당돌하게 명(命)을 거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성경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생각 없이 따라 부르다 자칫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왜곡 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음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삼상2:6~7, 욥1:21, 렘18:6)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정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이 노랫말에 들어있는 '현세지향적인 인생관'에 대하여서도 지적할 필요를 느낀다. 무병장수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병장수가 축복의 중요한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이라는 점에서 승리와 영광이 됨을 증거 해 주고 있다.(계21:1~2) 그래서 신앙인은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하며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것이다.(롬8:18, 딤후4:7~8)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1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여긴다. 결코 현세를 도외시하며 염세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영원히 이 땅에 살고 싶은 욕망은 자칫 햇빛보다 더 밝고 영화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세지향적인 삶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누구도 생사화복의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의 '어리석은 부자' 얘기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쉽게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비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오라하시면 누구도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살 수 있으며 일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며 하는 복된 기간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덧붙여 오늘 세대에 이 같은 노래가 그렇게 파장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비애(悲哀)도 느낀다. 사람들이 얼마나 무엇인가에 눌려서 살고 있기에, 어떤 권위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크기에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세상이 주는 매력에 얼마나 깊이 빠져있기에, 얼마나 운명을 거부하고 싶기에 '전해라' 한 마디에 그렇게 통쾌함을 느끼고 있는가 말이다.

이것은 분명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병리적 현상이 아닐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내세 지향적이고 영원을 바라보며 세속주의와 맞서 싸워야 할 교회와 성도들조차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영화로운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이 식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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