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꿈

돈키호테의 꿈

[ 주필칼럼 ] 주필칼럼

이홍정 목사
2015년 12월 29일(화) 14:43

오페라 '돈키호테'에서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으로 노래된 돈키호테의 꿈은,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역경의 삶의 한복판에서 토해낸 희망의 노래이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 가네, 저 별을 향하여 쉽게 닿을 수 없어도 / 온 맘 다하여 나가리 영원히 저 별을 향하여!"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스페인)는 외과의사로 각지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한 아버지 덕분에 정규 교육은 거의 못 받지만, 22세에 펠리페 2세의 왕비 추모시문집에 그의 시 세 편이 실릴 만큼 교양을 갖춘다.

23세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레판토 전투에서 영웅적 활약을 하다 왼쪽 팔이 불구가 되지만, "오른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이를 감내한다. 전쟁에서의 공로로 훈장을 받고 귀국하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5년 동안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한다. 네 번의 탈출 시도 끝에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33세 때 겨우 풀려나 11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다.

공적도 무시당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문필가로 출세하기 위해 희곡을 쓰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37세에 18세 연하의 여인과 결혼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고 에스파냐 함대를 위한 식량징발이나 세금수금 담당자로 일한다. 그 과정에 주교의 영토에서 행한 과잉징발로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공금을 맡은 은행가의 도주로 투옥되기도 한다. 소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생애 중 가장 굴욕적인 이 시기에 탄생되었다.

당대의 기사 이야기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을 기사 돈키호테로 착각하고 산초를 시종으로 데리고 모험에 나선 라 만차의 늙은 신사 알론조. 그는 모험 중에 용이나 마법사를 만날 것을 상상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며, 모든 사람에게 '과잉된' 의미를 부여하는 '진지한' 인간됨을 보인다.

그는 모험의 여정의 끝자락에 흑기사들의 거울 방패에 비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본 후에야 자신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노인 알론조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임종병상에서 그로 인하여 새로운 꿈을 부여 받은 여인 알돈자가 불러주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들으며 다시 돈키호테로 돌아온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시 일어서리라고 외치지만 끝내 숨을 거둔다.

잡히지 않는 꿈,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잡으려 했던 그 별, 우리는 그 별을 바라보며 다시 모험의 길 위에 서는 꿈을 꿀 수는 없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꿈들, 무엇이 그 꿈들을 앗아 갔고 우리는 지금 그 꿈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는가?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창궐한 세상, 우리 안에 있는 '돈키호테'의 꿈의 그루터기에 다시 희망의 새 줄기가 솟아나게 할 수는 없는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꿈의 '거인'을 다시 한 번 흔들어 깨울 수는 없는가?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꿈의 씨앗을 새롭게 찾아서 싹틔울 수는 없는가?

오페라 '돈키호테'에서 불려진 '라 만차의 사람'(Man of La Mancha)은 역경의 벼랑 끝에서 저항을 넘어 희망을 노래하는 세르반테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들어라, 썩을 대로 썩은 세상아, 너희들 세상은 끝났다. 나 여기 깃발 올리고 일어나서 결투를 청한다. 나는 나, 돈키호테 라 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 간다. 거친 바람 불어와 나를 깨운다. 날 휘몰아 간다. 그 어느 곳이라도 영광을 향해 가자."

바울, 다멕섹 도상의 회심 이후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자로 살았던 그의 꿈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죽은 자 같으나 산 자,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자, 근심 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었다(고후6: 8~10).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꿈, 그 꿈을 희망의 근원으로 삼아 지금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삶의 잔에 채우는 꿈, 그것이 바울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생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그리스도로 인한 희망의 절정을 노래하지 않았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오늘 우리들의 꿈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복음으로 갱신된 '돈키호테'의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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