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주필칼럼 ] 주필칼럼

이홍정 목사
2015년 12월 15일(화) 14:48

2015년, 격랑의 나날들을 아프게 끌어안은 채, 세월의 강이 그 깊이를 더 하며 갯벌 내음 물씬 풍기는 생명의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저문 강에 삽을 씻으며 가난한 노동의 하루를 매듭짓는 시인이 스스로 깊어지는 강을 보며 노래한대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일제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분단으로 인한 미완의 해방 70년 동안, 동서와 남북의 갈등은 남남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으로 얽혀지고, 우리들의 살림을 위한 삽자루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위한 투쟁의 삽자루로 변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국의 야욕이 충돌하는 한반도에는 동족상잔의 대리전을 치르며 6백만 생명이 집단살해를 당하는 지울 수 없는 형극의 흔적이 남겨졌다. 지금 분단사회의 상처와 공포에서 파급된 미증유의 삶의 위기를 견디지 못한 채, 젊은이들마저 생의 흐름을 스스로 멈추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의 시퍼렇게 피멍든 삶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시장에서 생명을 상품화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소외되고 차별 받는 소수자들의 눈물 속에서, 이산가족들의 메워지지 않는 삶의 간극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상실한 이주민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탐욕에 짓밟히는 자연의 신음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망을 이루며 흐르는 크고 작은 강들이 그 깊음을 상실한 채 말라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역류하며 생명의 강을 뒤덮어 가고 있다. 그 사이, 정의와 평화, 치유와 화해를 갈망하는 소외된 강들의 외침과 신음이 송곳이 되어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얼마나 작고 사사로우며 허망하기까지 한가? 금권의 사슬에 매여 하나님의 공의를 그르치며 지위를 탐하고, 동역자들의 살림의 토대인 연금의 안전망을 훼파하고,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고소고발을 난발하고,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기도 전에 진영으로 나뉘어 패싸움을 하고, 권력과 관계의 영향력을 무기로 상대방을 억압하여 굴복시키려 하고, 다름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아 시대의 이단으로 낙인찍어 추방하며, 역사의 진실마저 권력의 틀 아래 가두어 질식시킨 채, 모래알처럼 흩어져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는 다만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서로 다른 삽자루에 기대어 운명처럼 살아온 생애는 더 깊은 세월의 강에 합류되어 생명의 바다로 흐른다는 것이다. '샛강바닥 썩은 물에/달이 뜨는구나/우리가 저와 같아서/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이 깨달음이 우리가 욕망의 사슬을 끊고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순환의 정의에 눈떠야 할 이유이다.
 
2015년 세모, 기후변화로 인해 앞당겨지고 있는 지구 종말의 시계바늘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닫혀 있는 사랑의 눈을 뜨자. 탐욕과 이기심으로 혼탁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를 인정하며, 사랑할만한 더 많은 것을 가진 나와 너를 새롭게 발견하자. 우리들의 눈에서 오만과 편견의 비늘을 걷어내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는 깊은 강의 마음, 넓은 바다의 품을 갖자. 소유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그 날, 그 생명의 바다의 자리에 오늘 서서, 오히려 깊은 강을 역류하며 아픈 상처의 기억들을 꺼내어 보듬어 안고 서로 용서하자. 우리는 결국 생명의 하나님, 그 나뉨과 막힘이 없는 생명의 바다에서, 우리들 각자의 생의 삽자루를 타고 살아온 날들의 흔적들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진리의 춤을 함께 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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