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보라'

독자투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보라'

[ 기고 ]

정성은 교수
2015년 12월 09일(수) 10:37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고대 그리스 때에 이야기다. 변론학원 선생인 코렉스는 자기 학생인 티시에스가 수업료를 내지 않자 법정에 고소하였다. 법정에서 티시에스는 판결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은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설사 그가 재판에서 지더라도 그것은 선생이 자신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코렉스는 만일 티시에스가 재판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자신이 티시에스를 잘 가르쳤다는 증거가 되므로 티시에스는 결국 자신에게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판관은 나쁜 까마귀가 나쁜 알을 낳은 격이라며 둘 다 재판정에서 내쫓는다.

나쁜 성적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티시에스와 코렉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존스와 니스벳이라는 학자들이 1972년 연구에서 미국 학생들에게 시험을 망친 이유를 물었을 때, 학생들은 대개 당일 컨디션, 교과서, 시험 문제 등 상황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은 반면, 선생들은 주로 학생들의 자질에서 원인을 찾았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때는 주로 상황에서 원인을 찾고 남의 행위를 설명할 때는 주로 그 사람의 자질에서 원인을 찾는 것을 '귀인 오류'라 부른다.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 누가 조금 늦게 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시간관념이 불철저한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귀인 오류에 관한 연구들은 설령 약속에 늦은 사람이 교통 혼잡 등의 상황적 요인 때문에 늦었다고 설명을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자질에 대해 처음 내린 결론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근본적 귀인오류). 우리는 타인에게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귀인 이론 연구자들은 이 인지적 오류가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 비롯됨을 밝힌 바 있다. 우리의 눈이 앞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보지 못 하고 주위 상황을 보게 된다.

그런 결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에 대한 정보들에 주로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에 반해, 남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보다 그 사람 자체에 주목 하기에 남의 행동을 설명할 때는 그 사람 자체에서 원인을 찾는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1973년의 스톰스의 연구에서 비디오로 촬영된 피실험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니 자신의 행위도 자질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현대 심리학의 이런 결과들은 2000년 전 예수님에 의해 이미 제시된 것들이다.

예수님은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라고 우리들의 공정하지 못한 판단들을 질타하시고 그 원인이 피조물인 우리의 신체적 한계에서 기인함을 말씀하셨다.

타인의 잘못된 행위들을 그 사람 탓으로 여기고 나의 잘못된 행위를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감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귀인오류에 기반을 둔 소통은 타인들과의 관계를 단절 시킨다. 우산을 잃어버리고 온 아이에게 "너는 어떻게 되먹어서 맨날 우산을 잃어버리니?"라고 아이의 자질에 원인을 돌리면 아이는 절망한다. 마음 문이 닫힌다. 타인들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소통은 귀인 오류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늦었을 때, '늦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며, "혹시 오늘 길이 많이 막혔지요?"라고 물어줄 때, 그 사람과 공감이 형성된다. 이런 예는 비일 비재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신체 구조 그리고 우리의 본능과는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근본적 변화 없이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정성은 교수
성균관대 신방과/장석교회 집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