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9~14일

[가정예배]3월 9~14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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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5일(목) 16:10

월-더 큰 은혜를 향하여
본문 : 눅 17:11~19
찬송 : 251장

주님은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해주시고 자녀 삼아 주셨다. 그리고 이전의 모습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우리를 불러 주셨다. 오늘 본문은 귀한 존재인 우리들이 부르심의 상을 따라 달려가는 성도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단계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첫째, '멀리 서서 받는 은혜'의 단계이다.
 
12절 말씀에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님과 마주친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고쳐달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자신의 병 때문에 멀리 서서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탓하지 않고 찾아와 상처를 보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허물 많은 죄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 십자가로 다가오신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이다. 지금 고통가운데 있는가? 주님을 바라보라. 비록 죄와 허물 때문에 주님이 멀리, 작게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탓하지 않고 품에 안아주신다.
 
둘째, '순종할 때 받는 은혜'의 단계이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나음을 받고 제사장에게 갔다. 병이 나은 후에 간 것이 아니라 나은 줄로 믿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마을에 환자가 열 명만 있었을까? 당시 나병환자들은 여러 인종이 뒤섞여 꽤 큰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누가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침 받은 사람들의 수를 기록한 것은 아닐까? 많은 나병환자들이 모여 치유의 선포를 들었지만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난 열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열 명의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바란다. 믿음의 순종은 기적의 역사를 부른다.
 
셋째, '돌아와서 엎드리는 은혜'의 단계이다.
 
고침을 받았던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주님은 오지 않은 아홉을 찾으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고난 중에 주님과 만나서 열심히 소리쳐 기도하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감당할 수 없는 복과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주신 물질과 명예, 사람에게 취해서 주님을 잊고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았다면 더 큰 은혜를 향해서 주님이 계신 곳,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성도는 천성을 향해 길을 가는 순례자이다. 때론 그 여정이 힘들고 어렵지만 찾아오시고, 고쳐주시는 주님께 엎드려 감사할 수 있다면 주님은 더 크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놀라운 복과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모든 생각들을 만져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홍성철 목사
새롬교회


화-기다림과 성숙
본문 : 시 37:1~7
찬송 : 412장

속도가 미덕이요, 기다림을 지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식당에서는 음식을 주문하고 15분이 경과하면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서양의 속담에 "서두르면 망친다(Haste makes Waste)"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서 숙성해야 따는 열매들이 있다. 사람이 그렇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채워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 기다릴수록 기쁨이 커진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다림의 의미는 성숙이다. 기다림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성숙을 배워야 한다.
 
첫째, 기다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다려야 할 것이 있다.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다리지 못했다. 조급하여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했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증에 시달렸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마귀의 성품이다. 하나님께 마귀의 성품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둘째, 무엇을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성경은 기다리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잠잠하고'라고 했다. 말을 많이 하고, 불평하고, 조잘거리는 것은 기다리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침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둘째는 '참아'라고 했다.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이다. 기다림의 자세이다. 조급해 하고, 다투고,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이다.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아야 기다려진다. 인내(Patiece)와 열정(passion)이라는 두 단어는 라틴어의 '파시오(pasio)'에서 파생되었다. 파시오란 말의 뜻은 '견디다'라는 뜻이다. 인내는 견디는 것이다. 열정도 사실은 견디는 것이다. 견디는 것이 없으면 열정이 있을 수 없다.
 
셋째, 기다리면 길이 형통하게 된다.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다. 다윗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잠깐 기다린 것이 아니다. 오래 기다린 결과 하나님은 다윗의 말을 들으셨다. 기다림은 신앙이다. 기다림은 성숙이다. 기다림은 인격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데 사용하신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다.
 
오늘의 기도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전규 목사
신림교회


수-미완성의 전쟁
본문 : 수 23:16
찬송 : 347장

가나안 정복전쟁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해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그들이 영적으로 분명히 서 있지 않다면 여전히 미완성의 전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을 정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멸절당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그 땅은 말씀의 준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사람의 힘과 군대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의 준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조정민 저,두란노)'라는 책에서는 "가나안 땅의 바알은 세상의 크고 좋은 것을 사모하는 태도"라고 이야기 한다. 번영과 풍요를 말하는 것이다. 업적을 숭배하는 것이다. 더 많은 소유 그리고 더 많이 지배하고자 함인 것이다. 그들 가나안 땅의 바알은 결국 세상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바알에는 십자가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결국은 세상의 더 좋고 더 매력적인 것을 좇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바알의 신전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찾을 곳은 그곳이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뜻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땅의 권세가 다다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 세상의 힘에 의하여 악한 자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않는다. 악인들이 아무리 거듭 공격을 하여도 무너지는 쪽은 그들 자신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에 견고하게 서 계신다. 우리의 미래가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는 다른 세상적인 요소가 더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방패시요 나의 힘이 되심을 고백하자.
 
오늘의 기도
 
삶을 살아갈 때 이 땅의 방법이 하나님 아버지만 따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주 목사
대구남덕교회


목-짐을 서로 기쁨으로 지자
본문 : 갈 6:1~2
찬송 : 337장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 모든 사람에게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 힘에 겨워 벗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죄, 죽음의 짐이 각자에게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죄의 짐을 벗어 버려 짐이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성도들에게 짐이 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공동체로 집단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써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선택이라는 기로에 서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과정에서 때로는 선한 것을 때로는 악한 것을 선택하여 나아간다.
 
오늘 갈라디아 교회에서 성도에게 어떤 범죄한 일(성령과 동행하지 않는 삶, 육체의 일)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다.
 
첫째,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신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써 누구든지 죄에 노출되고 유혹되거나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남의 잘못이나 죄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구원 받은 성도라면 그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임을 잊지 말고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하여 내 자신은 그런 약점이나 허물이 없는지 점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내면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둘째, 온유한 마음으로 범죄한 자를 바로 잡아주라고 하신다. 우리의 마음은 좁고 모가 나 있어 범죄한 사람을 더 드러내고 짓밟고 내가 더 높아지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온유한 마음(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바로 잡아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무릇 너희의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하셨다. 모세의 온유함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어 나왔듯이,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능력은 온유함이다.
 
셋째,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짐은 헬라어로 '바레'라 하는데 시험거리들을 의미한다. 범죄한 사람이 왜 그런 죄를 짓게 되었을까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유나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살펴보고 함께 그 짐을 나누어지라는 말씀이다. 함께 나누어지면 소망가운데 함께 일어나 시험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다.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아 주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 그 짐을 기쁨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 교회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기쁨으로 짐을 나누어지는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자.
 
오늘의 기도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바로잡아주고 함께 짐을 기쁨으로 나누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숙 목사
장암교회


금-용서로 성령을 기쁘시게
본문 : 엡 4:30~32
찬송 : 312장

며칠 전 '분노의 시대에도 용서는 살아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임신 7개월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아들을 치어 숨지게 한 후 뺑소니친 차량의 운전자를 용서해 준 강태호 씨. IS 수니파 급진무장 세력에 아들을 잃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만, 이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드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본인 이시도 준코 씨. 미국 그린리버킬러 재판정에서 48명 연쇄살인범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그를 향해 증오의 말을 쏟아낼 때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당신을 용서 한다"고 말함으로 결국 살인범이 울음을 터뜨리며 유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게 만든 로버트룰 씨의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성령을 근심케 한다고 지적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하나이지만 그 씨앗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열매를 많이 맺는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감격과 내적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시켜 드림으로써 영적 생활의 기반을 완전히 부수는 결과를 가져온다.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감정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은 사라지고 분노하는 순간만큼은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미움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라난다. 용서야말로 미움과 분노의 고리를 끊어주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사도바울은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32)"고 말한다. 우리는 때로 용서를 실천하려다 낙심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인격으로 용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의 기준으로 용서하라고 한다. 사랑으로 매듭짓지 않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의 포기이다. 사랑은 용서하게 하고 용서의 실천은 더 큰 사랑을 알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함으로서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관계 속에 사랑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인내와 아픔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겪는 그 고난과 희생을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이를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용서로서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늘도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하면서 성령이 기뻐하시고 춤이 되게 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숙 목사
예수사랑교회


토-좋은 것을 택하다
본문 : 눅 10:38~42
찬송 : 285장

거룩이란 무엇인가? 헬라적 사상이나 동양적 사고로 이해하기 어렵다. 복음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거룩의 개념은 금욕주의로 인식되었다.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한다. 청렴해야 한다. 죄를 짓지 않고 완벽해야 한다. 세상 것과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된다. 예배만 드려야 한다.
 
그러나 히브리 사고 곧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은 평범한 것의 반대이다. 특별한 것이다.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특별히 구별하여 놓은 모든 것이 거룩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이 거룩이다. 사람의 말은 평범하다. 하나님 말씀과 구별된다. 세상의 책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는 민족은 거룩하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말씀 위에 어떤 것도 올려놓지 않는다. 심지어 낡은 하나님의 말씀의 책은 토라의 무덤(헤브론 공동묘지 위치)에 장사지낸다.
 
예수님께서 심방을 오셨다. 언니는 열심히 주님을 대접하려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 동생은 예수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언니가 예수님께 동생으로 나를 돕게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도리어 동생을 칭찬한다. "너는 여러 일로 분주하지만 동생은 좋은 것을 택했다." 오늘 우리는 내 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곧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여긴다. 내가 성대하게 음식을 차려 주님을 공궤하면 기뻐하실 것이라 믿는다. 내식대로의 믿음이다. 거룩은 하나님 말씀이다. "동생이 좋은 것을 선택했다." 이 말씀은 창세기 창조사역에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같은 말이다. 선을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오늘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동생은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듣는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순종의 자세이다. 언니는 자기식대로 주님을 섬기려다가 화가 났다. 언니는 주의 말씀 듣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했다.
 
오늘 나는 주님의 말씀 듣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가? 주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분주함 속에서도 주님 앞에 다가서는 시간 공간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높이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씀 듣는 시간을 분주한 일상의 일들 속에서도 꼭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인규 목사
대전충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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