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 성서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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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7일(화) 16:30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가라지는 잡초다. 우리나라에서 볏모를 심으면 불청객처럼 함께 피어나는 '피'라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이 역시 볏과에 속해 외관상 벼와 구별이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밭에 좋은 씨를 심었는데 대체 가라지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우리는 바람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바람에 씨앗이 날려 피어난 이 가라지의 기원을 이 비유 속의 주인은 '원수'의 소행으로 돌린다. 종들이 이 가라지를 뽑아낼 의욕을 보이자 주인은 말렸다. 이유인즉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까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란다.

이 비유의 역사적 배경으로 흔히 젤롯당의 폭력투쟁이 거론된다. 그들이 설정한 '악의 축'에 속한 세력과 물리적인 힘으로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피차 많은 생명이 죽고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죽어 마땅한 악한 죄인들도 많았겠지만 불쌍하게 죽은 애꿎은 생명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빗대어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는 현실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우회적으로 젤롯당의 종교적 투쟁 열기에 반대했다는 관점이 거기서 생겨난다. 그럴듯하지만 딱히 유일한 정답이라고 보기엔 부담스럽다. 오늘날 이와 더 어울리는 상황도 있다.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수십 년 복역했는데 나중에 진짜 범인이 나타났다는 식의 사례가 그렇다.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이가 이미 사형을 당한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판단이 아무리 엄정하다 할지라도 늘 이런 허방과 실수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함부로 나대면서 최후의 심판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알곡을 뽑거나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강 이런 식의 논리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논리를 동원하여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내기 위한 치열한 투쟁과 참여의 용기를 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신중하게 분별해도 결국 우리는 선택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하는 실존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이 비유는 아무리 올곧은 동기나 선한 의욕도 '가라지'같은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우리의 삶을 왜곡 또는 변질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그래서 신중해지고 또 조심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 또한 나중에 하나님의 종말 심판이라는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모든 자들에게 적용될 가장 공정한 기준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이 땅에서 억울하게 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불쌍하게 죽은 자들에게도 패자부활전의 희망이 있다. 비록 이 땅의 사법적 심판이나 역사의 심판에서 건진 게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가장 공정한 재판정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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