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월 26~31일

[가정예배]1월 26~3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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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2일(목) 11:59

월-하나님의 수준과 인간의 수준
본문 : 요 4:11~18
찬송 : 426장

우리에게는 세상이 원하는 수준과 예수님이 원하는 수준이 있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인다. 성도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본문 말씀에 보면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육체적 갈증을 해결하는 신기한 생수로 오해했다. 먹고 마시는 문제 육체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으로만 바라본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저 세상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께 실망하고 돌아서게 된다. 성도는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세상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들은 세상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풍성함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며 기뻐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생수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그 생수는 구원의 생수이며 영혼의 갈증을 채워 주는 성령의 생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육체적 갈증을 가지고 산다. 동시에 영적인 갈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비록 육적인 갈증이 해결된다 해도 영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이 영적인 갈증은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영혼에는 이미 영원히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생수가 흐르고 있고 생명의 생수가 솟아나고 있다. 우리들은 날마다 영원한 생명의 우물에서 그 생수를 마셔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생수를 이 사마리아 여인은 또다시 이 땅에서 목마르지 않게 하는 신비한 생수로 오해한다. 이때 예수님은 갑자기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 영적인 파산 상태를 깨닫게 하여 영적인 갱신을 일으키고 영혼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시려는 은혜의 메시지이다.
 
거듭남은 지은 죄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성도의 영적인 충만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발견하여 회개함으로 시작된다. 건강한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베드로사도가 설교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지은 죄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듯이 지은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 놀라운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늘 예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 우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믿음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철저히 고백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원락 목사
목양교회


화-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삶
본문 : 암 4:4~5
찬송 : 539장

예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삶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며, 소중한 예배는 우리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본문 아모스 4장의 말씀은 당시 북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향해 외친 전형적인 말을 의도성 있게 흉내 내어 풍자하고 있는 내용이다. 요즘 말로 하면 패러디이다. 아모스의 패러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최승호 시인의 표현대로 하면 '자동 세탁기'와 같은 예배로 드리는 그 당시 백성들의 예배 모습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의미 있는 패러디인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벧엘과 길갈은 북 이스라엘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성소들이다. 그런 곳이었기에 제사장들은 벧엘로 나아와 길갈로 나아와 그들의 죄를 씻고 깨끗함을 받으라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과 뜻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가버린다.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불의에 무관한 채 종교적 제의에만 치중한 가증한 모습으로 살아간 것이다.
 
남 유다 드고아 사람까지 북으로 보내서 그들을 향린 가슴 아프게 외칠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거룩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을 찾는 것이다. 그 곳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분 앞에서 감출 것 없는 모습으로 서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기에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조우를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은혜와 사랑을 통한 위로와 치유, 격려와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가시덤불 앞에서 신발을 벗는 모세의 겸손함'과 '아들까지 내어 드리는 아브라함의 헌신적인 마음'과 '갈등과 죽을 것 같은 고민을 들고 밤새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결해냈던 야곱의 치열함'으로 드려야 한다. 또한 그 모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예배가 우리의 살길을 열어주고, 생명의 기운을 되찾게 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은총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2015년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되길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된 열매가 맺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의신 목사
광주다일교회


수-물두멍을 지나 성소로 들어가라
본문 : 출 30:17~21, 38:8
찬송 : 266장

성소 안, 성막 앞에는 번제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회막과 단 사이 즉, 성막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물은 생명을 좌우하는 물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출 30:19)." 화제를 사를 때에 뿐 아니라 성막 안에 들어갈 때에도 씻으라고 하신다. 죽고 사는 문제가 번제단 에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물두멍에도 있었다.
 
번제단과 물두멍, 이 두 가지를 성막 앞에 두신 목적은 지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의 피는 영원한 속죄요,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곧 거룩한 성령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와 물을 같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신 후에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셨던 것이다. 번제단에서 그리고 물두멍을 지나면서 우리의 죄가 태워지고 씻어지듯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우리의 죄를 직면하고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더욱더 온전하게 영혼이 회복되어 주님의 얼굴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기를 원한다. 이것이 구원, 곧 죄 사함의 목적이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만이 속죄의 전부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게 하는 성소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가길 원하신다.
 
물두멍은 오직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에게만 허락되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삶은 제사장(예배자)인가?
 
번제단 앞에서 물두멍을 등진 채 회막 문밖 세상으로 나간다면 그는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은 물두멍을 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성소로 들어간다.
 
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은 손과 발을 씻고 거룩한 옷을 입어야 했다. 그 두 손에 등대의 불을 밝힐 거룩한 기름과 분향단에 피울 거룩한 향이 들려 있었다. 제사가 열납되면 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덮였다.
 
부모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그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영이 살아있는지 자녀들은 알고 있다. 십자가는 말이 아닌 삶으로 지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이 제사장이다. 하나님은 지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제사장을 찾으신다.

오늘의 기도
 
모든 더러움을 씻고 거룩한 성령의 강물이 자녀들의 심령에서 솟아오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일규 목사
신봉중앙교회


목-우리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본문 : 수 8:30~35
찬송 : 327장

마음속에 숨긴 일이나 생각하는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고백이라 한다.
 
교회에서의 고백은 자기 신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인데 최초의 신앙고백은 세례를 받을 때 행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여리고 성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이성에서는 대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함과 유다 지파 아간의 범죄와 자만이었다.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어진다. 이를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했다. 그 후에 가나안 전쟁을 위한 출정을 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고백한다.
 
31절에서 여호수아는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새 돌로 제단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깎아 우상을 만드는 행위와 이방인의 제사와 성격이 다른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번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배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백성임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 예배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감사와 헌신을 다짐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야 그 땅에서 복될 수 있음을 상징한 일이었다.
 
에발산은 940M로 그리심산이 880M보다 높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언약의 말씀, 모든 율법과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했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 수치 실패가 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승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 찬양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상처와 아픔 실패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가슴으로 눈물로 드리는 예배이다. 길을 모르고 방법을 모를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원인과 해결책을 주신다.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생명의 구원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예비하신 복은 순종을 통해 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에 선포되어져야 한다.
 
생명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복을 붙잡으라고 선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의 산과 저주의 산 사이에 다 함께 모여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자신들은 그의 백성이라고 한목소리로 고백했다.
 
죄를 범했다할지라도 가정예배를 통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사용하심을 받는 가족이 되길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허물을 깨닫고 회개할 때 십자가의 능력으로 저주와 실패를 복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실 목사
부천교회


금-좋은 소문이 있는 교회
본문 : 살전 1:1~10
찬송 : 321장

사람들은 누구나 이왕이면 소문난 장소,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게 된다. 역시 소문대로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소문을 낸다. 이처럼 좋은 소문이 퍼지면 잘되고 번창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
 
교회도 좋은 소문이 나야 한다. 좋은 소문이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머지않아 부흥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교회마다 좋은 소문이 있었다.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성령충만한 교회,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 안디옥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 오늘 데살로니가교회 역시도 좋은 소문이 있는 교회였다.
 
바울의 짧은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복음이 말과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5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확실한 회개가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좋은 소문이 있는 교회였다.
 
첫째,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을 가지고 일하는 교회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만이 믿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둘째,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 여기서 '수고'라는 말은 '채찍으로 맞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한다.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마음에 담고만 있다고 해서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였다. 그렇다. '수고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셋째, '소망의 인내'가 있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고 기다린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입구에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은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그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했다.
 
앞으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아름답고 좋은 소문이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전국과 세계에 널리 퍼져 힘있게 주님의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좋은 소문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셔서 교회가 부흥하고 힘있게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원곤 목사
영해교회


토-두려움에서 기도의 자리로
본문 : 창 32:13~28
찬송 : 364장

인간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진 사람들은 잃음을 두려워하고, 없는 사람들은 없음을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 성경은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우리보다 먼저 불안을 경험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야곱이다. 야곱은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장자가 된 사람이 아니었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권의 축복을 빼앗았다. 이 사건으로 야곱은 형 에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밧단아람으로 피신한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온 야곱은 31장까지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사랑하는 아내를 14년의 봉사를 통해 얻고, 그 후 6년 동안 열심히 일해 큰 위기 없이 부자가 된다.
 
큰 성공을 이룬 야곱이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야곱에게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형과의 화해였다. 32장에는 형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야곱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우선 선발대를 에서에게 보낸다. 사신들이 돌아와 야곱에게 "에서가 400명이라는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해졌다.
 
지금까지 성공한 길을 달려왔기에 32장의 위기는 하나님께 무릎 꿇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창세기 29장 이후부터 성공한 야곱이 기도하였다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야곱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과 가축들, 식구들을 두 떼로 나눈다.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보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문제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야곱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기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성공의 길을 달려오느라 기도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던 야곱이 위기 앞에서 기도의 길로 돌아간다. 헨리 나우엔은 "고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많은 얼굴들에 쓸데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의 눈을 우리 구주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철저히 홀로 남아 하나님께 무릎 꿇는 야곱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의 사람으로 바뀌어진다.
 
기도함으로 인생의 두려움을 향해 정면 돌파하는 삶이 되자.
 
오늘의 기도
 
두려움에 좌절하기보다 기도함으로 주님이 주신 승리를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근기 목사
큰기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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