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

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

[ 성서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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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09일(화) 17:36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친 맥락으로 죄인과의 식탁교제를 제시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자 이 비유를 들려준 것이다. 마태복음의 평행문에서 이 비유의 결론으로 제시된 말씀은 이렇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명료하다. 이 세상에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신다. 행여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바로 그런 연유로 그들을 모조리 되찾아 회복시키며 천국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신다. 여기서 구원의 배타성을 드러내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아가 경건과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기동일성의 성채를 짓고 그 기준에 안 맞는 이들을 내치려는 파당적 의식의 자취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선인과 악인,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넓디넓은 포용의 품, 하나님의 품만이 오롯하다.

그런데 왜 양 한 마리였을까. 목자가 백 마리 양을 치다가 한 마리를 잃었는데,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들에 방치해둔 채 그 한 마리를 찾아 발견하기까지 돌아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물량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모험이다. 그러다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 손실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이즈음 교회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중시한다. 한 마리를 희생하더라도 아흔아홉 마리를 지켜내는 것이 상식에 맞는 듯 보인다. 큰 것, 많은 것, 중대한 것이 작은 것, 적은 것, 사소한 것과 충돌할 때 전자를 위해 후자를 내려놓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역발상을 통해 오히려 후자에 관심을 두시고 찾아낼 때까지 찾아다니시는 모험을 무릅쓴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물량주의의 가치관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허황된 물량공세의 틈바구니로 인간이 상실해버린 생명의 가치를 바라보신다. 그래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았다고 그보다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까지 베풀고 즐거움을 나눈다.
많은 것, 크고 대단한 것에 취해 사는 세태 속에 교회가 감염된 지 오래다. 교회 내에서도 점점 더 번드르르한 것에 경도되는 현상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의 작고 사소해 보이는 생명의 가치에 눈떠야 한다.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을 만한 사람에게 잠재된 회개의 씨알을 무시한 채 이미 의롭게 된 다수의 화려한 영광에 도취해버리면 교회가 예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갈 수밖에 없다. 그런 교회에 공동체는 없다. 또 그런 삶 속에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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