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부산총회 1년 '평가와 과제' (3)오해 왜 안풀리나

WCC부산총회 1년 '평가와 과제' (3)오해 왜 안풀리나

[ 특집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4년 12월 09일(화) 16:44

정성진 목사
거룩한빛광성교회

 
한국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 할 만큼 분열의 영의 지배를 받아왔다. 장로교회가 1951년에는 고려파, 1953년에는 기장, 1959년에는 소위 '통합'과 '합동'이라는 두 개의 교단으로 나뉘게 되는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장로교 통합과 합동의 분열의 시작은 1953년 장로회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가 새 신학교 부지를 서울에서 물색하는 과정에서 정치권과 인맥이 있다고 알려지던 박호근이라는 사람에게 의지하면서 발생하였다. 그런데 박호근은 교장의 결재 하에 받은 3000만 환을 개인적으로 탕진하였을 뿐 대지 불하나 건축 허가도 얻어내지 못하게 되면서 박형룡은 결국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박형룡 박사는 1958년 43회 총회에서 사표가 수리되었고 새 교장 서리로 노진현 목사가 선임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국 선교 75주년을 기념하고자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당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대 수를 보유하고 있었던 경기노회 총대선출 문제로 또 다시 박 교장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던 측은 박 교장 책임 추궁에 적극적이었고, 박 교장을 비호하던 NAE(복음주의협의회) 측은 서로 자파세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5월에 모인 경기노회 정기회에서 총대 투표를 한 결과 NAE측 18명, 에큐메니칼 측 10명으로 선출되면서 NAE측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는 듯하였으나, 절차상 부정 선거가 확인되면서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었고, NAE측에서는 1명 목사 장로가 각 1명씩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모두 에큐메니칼 측에서 당선되는 역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NAE측 이환수 목사가 불법으로 판정된 총대 명단을 총회 서기부에 다시 제출함으로서 두 총대 명부가 총회에 접수되는 등 파행이 예상되었으나 임시노회 측 124표, 정기노회 측 119표, 기권 5표로 임시노회 측이 결국 총대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이 목사가 이미 일단락된 경기노회 총대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과정에서 NAE측인 박희몽 장로 등이 나와 총대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에큐메니칼 측은 '용공(容共)', '신(新) 신학', '단일교회운동'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회의를 방해하였지만,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자파(自派)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방치하였다. 노 목사는 자파 총대가 많은 정기노회 측 총대를 되살려 볼 생각으로 이 일을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까지 제안했으나, 대전중앙교회에서 총회장 노 목사가 11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의 총회재개 건을 에큐메니칼 측의 '아니오' 소리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가결을 선포하는 등 불법사회를 저질렀고, 이에 반발하여 불신임을 제안한 안광국 목사의 제안이 오히려 가결되자 부총회장이자 대전중앙교회 목사이던 NAE 측의 양화석 목사가 장소를 더 이상 빌려줄 수 없다며 회원들을 축출하면서 결국 에큐메니칼 총대들의 '연동측'과 NAE 측의 '승동측'이 서로 따로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합동 측(승동 측)'의 분열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와 같이 역사적 사실 관계를 정확히 복기(復碁)해 보면, 박형룡 박사를 지지하고 그의 후광(後光)을 입고 있던 인사들이 박형룡 박사가 처벌되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박 교장의 일선 후퇴를 '보수 정통의 후퇴'요 이는 결국 '위험한 자유, 진보의 확산'을 야기할 것이라는 엉뚱한 신학 논쟁을 일으키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로 비화시킨 것이다. 박 교장의 인책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대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던 사람임을 악용하여 NAE 측 인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자유주의자' 내지는 '용공주의'로 몰아가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WCC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암스테르담 창립총회에 김관식 목사를 대표로 파송했을 때부터이다.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제2차 총회 때는 김현정 목사 등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장로교회와 WCC의 관계가 진척되고 있었으나 NAE 측 인사들 결국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미국의 근본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yre)로부터 10만 달러를 지원받고 오늘의 사당동 총신대 자리로 옮겨 가면서 결국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을 가져오고 말았다.(이상 김인수 교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하)' 참조)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파벌(派閥)주의', '계파(係派)주의'를 거론하곤 한다. 정치가 국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매우 불행하게도 하나님나라를 전파해야 할 한국교회 역시 한국 정치의 고질적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설득 커뮤니케이션에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것이 있다. 서양식 칵테일파티에 수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지만 내 귀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만 들리게 마련이다. 1953년 영국의 왕립 런던 대학에 근무하던 콜린 체리(Colin Cherry)는 실험을 통하여 '인간의 귀는 자신에게 필요없는 소리에 대해선 마치 효율이 뛰어난 필터를 끼운 것처럼 걸러내 버린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인간이 한 번 '진영 논리'에 갇혀 버리고 나면 자신과 관련된 정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 더 나아가 이미 자신이 품고 있던 선입견이나 전제들을 강화해 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WCC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WCC가 아무리 '종교다원주의'가 아니고, '용공'이 아니며,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객관적인 근거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여도 이미 귀를 닫아 버린 이상 아무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은 물론 학자적 양심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야 할 신학교 교수들까지도 이러한 '진영 논리'에 완전히 포박(捕縛)되어 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WCC 역시 지상의 모든 교회들처럼 완전무결한 단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개선되고, 개혁되어야 할 영역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전히 '자파(自派)주의'나 '진영 논리'에 머물러 극단적으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한 WCC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화나 타협은 불가능하다. 신분, 교파, 교단,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고려하고 소속된 진영의 논리에만 충실한 전(前) 근대적 자세를 내려놓고 사실과 주장의 합리성을 주목하는 탈(脫) 진영 논리에 설 때에 WCC에 대한 오해는 비로소 조금씩 풀려질 것이다.

WCC도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신학적 해석과 논쟁 등 높은 이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Local Church)가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친밀도 높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한국교회에서 WCC는 아직도 낯설고 이질적이다.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와 NCCK가 아직도 지역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상황에서 WCC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WCC는 본교단을 비롯한 회원 교회(교단)들이 지역의 풀뿌리 교회들과 에큐메니칼을 이해하고 친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해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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