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양식, 기도 (2) 예언자적 기도ㆍ개인의 기도

내 영혼의 양식, 기도 (2) 예언자적 기도ㆍ개인의 기도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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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4일(금) 17:07

최광선 교수
호남신학대학교ㆍ영성신학

15세기 러시아 수도승 안드레이 류브레브(Andrei Rublev)는 성삼위일체 성화를 그렸다. 당시 러시아는 흑사병과 전쟁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겼던 이가 세르게이성인이었다. 성인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자 수도승 류브레프는 삼위일체성화를 그려 성인의 삶과 헌신을 기리며 추모했다. 이 성화의 성경적 배경은 창세기 18장이다. 수도승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는 세 천사를 대접하는 그 모습을 성삼위일체로 그려냈다. 인류의 유산으로 사랑 받는 이 성화를 가만히 묵상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맺는 친밀한 교제이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알 수 있다.

이 성화는 기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에 참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한 세 천사는 상호존중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다. 하나의 완전한 사랑의 원 안에 삼위를 존재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기록된 말씀을 그림으로 구현해 냈다. 이 사랑의 교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 자신도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받는다. 이를 잘 묘사한 헨리 나우웬은 "우리도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고 말한다. 삼위하나님의 신비를 페레코레시스(Perichoresis)로 설명했던 방식을 이 성화를 통해 상호내주와 친밀한 교제의 모습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 성화는 기도자를 초대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망 이외의 모든 것을 제하고, 정화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아를 이 식탁의 교제 안에서 찾도록 말이다. 세상은 내가 가진 것에서 나를 찾으라하니 무엇이든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한다. 내가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타인의 평가가 바로 너이니 마땅히 응답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음성에 응답할 때 우리는 참자유가 없음을 알고 있다. 기도에는 이러한 세상의 음성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근본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들었던 '사랑 받는 자'라는 근본적인 관계의 음성이다. 기도는 사랑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통하여 사랑 받는 자의 음성을 듣는 자리이다. 이 음성은 기도자로 하여금 자유와 해방 그리고 신뢰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또한, 성삼위일체 성화는 묵상을 통하여 우리를 이 세상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리스도께 응답하라고 초대한다. 성화 안에서 세분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성화 좌편에 앉아 계신 분을 성부로, 중앙에 앉아계신 분을 성자로 그리고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화가는 중앙에 앉아 계신 성자를 두 가지 상징 안에 위치시켰다. 그것은 성찬의 잔과 십자가이다. 세 천사가 둘러앉은 테이블은 잔의 모습을 보이며, 그 테이블 위에 성찬의 잔이 놓여 있다. 더욱더 큰 신비는 성부와 성령께서 성찬의 잔을 만들고 그 안에 성자예수님을 위치시킨 것이다. 성화 안에 있는 다른 상징은 성부와 성령께서 십자가의 가로축을 만들고 성자께서 십자가의 세로축을 만들어 성자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께서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성찬의 잔과 더불어 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며 현존하시어 창조와 구원사역을 계속해 가시는 그리스도를 잘 드러낸 것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기도자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대면하며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삼위일체 성화를 묵상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이며 동시에 응답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성화는 기도자로 하여금 기도의 범주가 개인의 정화나 하나님과 맺는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초월하게 한다. 그것은 삼위일체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계시듯,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지구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사랑에 응답하라는 전사회적이며 전 지구적 초대가 들어있다. 기도자는 삼위일체하나님께서 세상에 참여하시는 방식으로 세상과 사회에 참여하기를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그 참여하는 방식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며 안다. 기도를 지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보이셨던 것처럼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의 저자 베켓은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기도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삶이며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실천적인 삶으로 초대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시대를 무엇에 비유할까?"하셨던 말씀을 떠올려본다. 예수께서는 시장에서 피리를 불어도 응답하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장터의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의 현실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경제위기, 전쟁위기, 질병위기, 생태위기,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위기에 직면해있다. 특히 생태위기 관점에서 현재 지구는 여섯번째 대량멸종을 맞이하고 있으며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멸종위기종이라 부르고 있다. 쟌 캅이라는 노신학자는 '영적인 파산'에서 이러한 위기에 응답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인류 전체를 향해 인류 전체가 미쳐있다는 가슴 아픈 지적을 한다. 토마스 베리는 사라져 가는 생명종은 단순히 한 종의 멸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 자체를 지워버리는 신성모독이라 한다. 이를 생각한다면, 생태위기의 상황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응답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도록 요청받는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무응답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허상임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관련하여 소개한 성화 속의 세 천사는 죄악이 가득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존과 공멸의 갈림길에 서 있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맺는 친밀한 교제와 이에 응답함으로서 생명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기도는 그곳이 골방이던 교회이던 시장이던 하나님과 맺는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며 일상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민감하게 응답하는 삶 자체이다. 우리가 사랑하며 응답하기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어디에 계시며, 어디에서 피조물과 함께 신음하는 성령하나님의 탄식을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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