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양식, 기도 (3)한국교회의 '거룩한 독서'

내 영혼의 양식, 기도 (3)한국교회의 '거룩한 독서'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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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4일(금) 17:06

이강학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ㆍ기독교영성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지향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시작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비롯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성훈련으로서 기독교 영성사를 통해 잘 입증된 말씀 묵상법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거룩한 독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열심히 해온 성경공부와 큐티를 비롯한 말씀 묵상법이 기독교인의 삶을 변화시켜서 예수님을 닮게 하는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반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삶의 변화란 우선 마음의 감동이 일어나고 그 힘으로 동기와 갈망이 정화되면서 지속적인 영성훈련과 함께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는 등의 파상적인 움직임이 시간을 두고 전인격적으로 일어나야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말씀묵상 경험은 어느 순간부터 전인격적 경청과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지적이거나 감정적인 만족에 머무는 수준에서 멈춰버린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전인격적 말씀 묵상과 순종을 지향하는 영성훈련으로서 거룩한 독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거룩한 독서라는 말씀 묵상법은 그 표현이 6세기에 설립된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칙서에서 처음 발견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네딕트가 처음 창안한 것은 아니다. 거룩한 독서가 성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편 119편 97~104절을 살펴보면 곧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편 본문은 말씀 묵상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첫째, 말씀 묵상 준비는 말씀 사랑에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97a). 시편 기자는 말씀을 묵상하기에 앞서서 '주의 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까닭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계속 퍼올려지는 생수 같은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할 때 똑같은 경험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말씀 묵상을 준비시켜주고 지속시켜주는 힘이 바로 이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둘째, 말씀 묵상은 말씀 암송으로 시작한다: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b). 묵상이란 원래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기 위해 암송은 필수적이다. 정해진 성경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나와 공동체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들을 선택하고 암송하여 마음에 담는다. 셋째, 말씀 묵상은 종일 하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b). 어쩌면 말씀 묵상이 아침 경건의 시간 또는 새벽예배 때 완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면 성경적 묵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묵상은 '종일' 진행되는 것이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대로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사랑의 편지'라면 말씀 묵상은 종일 진행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종일 보고 싶고 종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수도원의 역사에서 세 시간에 한 번씩 묵상과 예배를 위한 시간을 가진 것도 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 넷째, 말씀 묵상은 말씀 순종으로 이어진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100a),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101),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02). 말씀 묵상의 완성은 말씀 순종에 있다. 순종의 실패는 열매 없는 삶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했으면 일상 생활에서 내 몸이 순종할 태도와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최근 한국 교회가 힘들어진 이유는 말씀 순종에 실패했기 때문이거나, 개인 경건의 범주 안에서만 협소하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말씀 묵상은 말씀의 단맛을 경험케 해준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말씀의 단맛은 말씀 묵상을 신실하게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이 단맛 경험으로부터 말씀 묵상과 말씀 순종을 지속시키는 힘이 나온다.

거룩한 독서는 시편 119편 97~104절에 담겨 있는 말씀 묵상의 정신을 수도회 공동체의 일상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에 이르러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글에서 거룩한 독서를 네 단계로 나누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독서, 묵상, 기도, 바라봄(관상). 첫째, 독서의 단계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주의를 기울여 읽는 단계이다. 정보를 얻기 위한 정보적 읽기(informative reading)가 아니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형성되기를 갈망하는 형성적 읽기(formative reading)이다. 또한 읽기는 동시에 순종을 염두에 둔 듣기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읽는다. 둘째, 묵상의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인격적인 기능을 사용하여 생각해보고 느껴보는 단계이다. 묵상은 곧 되새김질(rumination)이라고 자주 비유한다. 묵상의 단계에서 지성적 경험인 깨달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감성적 경험인 사랑과 평화 또는 부끄러움과 뉘우침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셋째, 기도의 단계는 묵상의 단계에서 일어난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올려드리는 단계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사와 찬양을 표현하거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를 표현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도우심을 요청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을 맹세하는 등의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바라봄의 단계는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이 일어나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단계이다. 기도하는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일어나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경험이며, 성령님을 통하여 내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형성시켜주는 경험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이 경험을 컨템플레이션 (contemplation, 관상이라고 번역)이라고 표현해왔다.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에 일어나는 경험은 성령님의 자유하심에 맡겨져 있으므로, 기도의 실제에 있어서 네 단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적용하려고 시도하면 무리가 된다. 그러나 대체로 거룩한 독서를 할 때, 기도하는 사람의 경험은 네 단계를 자연스럽게 따라 흐르게 된다. 앤조 비앙키의 책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는 독서에서 기도까지의 흐름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거룩한 독서에서는 독서, 묵상, 기도가 구분된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샘물이 솟아오르듯 이어진다. 또한 귀고 2세는 각각의 요소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관상(바라봄)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관상[바라봄]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허성준 역)." 메마름, 오류에 빠짐, 냉담함, 열매 없음 등의 경험이 일어날 때, 위의 요소들 가운데 혹시 어떤 부분이 빠졌는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영성가들은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에 '실천'이라는 하나의 단계를 더 추가하였다. 실천 즉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말씀 묵상은 지적이거나 감성적인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묵상이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삶의 변화, 즉 열매를 가져왔는지 매일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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