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승 방지일 목사님을 그리며

내 스승 방지일 목사님을 그리며

[ 기고 ] 독자투고

손영호 목사
2014년 10월 22일(수) 09:52

이른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와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떠 있었다. "방지일 목사님이 지난 밤에 가셨답니다." 언젠가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싸 했다. 목사님과 같은 노회에서 목사 되어 지금껏 46년을 존경하며 메일을 주고받고 배우며 살아온 은사 방지일 목사님이 가셨다. 찾아뵙지 못하고 얼마 전에 전화만 드렸던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만나면 반가워 기뻐하시고 심지어는 손자 안부까지 물으시며, "하 저런! 그렇구먼"을 연발하시며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모습으로 웃으며 호응해주시던 아버지 같은 방 목사님의 그 모습,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필자가 목사된 30대 초반 시절, 어느 교회를 소개하여 보내시면서 "손 목사 같은 사람은 흥해야 하겠고 나 같은 사람은 쇠해야 하리라"고 하셨다. '나 같은 사람에게 저런 말씀을 하실까?' 부담스러웠지만 격려하시려는 말씀으로 알고 자신을 그렇게 낮추어 상대를 위하는 그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1970년대 초 한강 남쪽을 한남노회라 할 때, 수원 서둔교회에서 제주성안교회로 가려는 마지막 주일 저녁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필자를 격려하시려고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근래에 우리노회에서 세 사람이 제주노회로 갔다가 짧게는 9개월, 길게는 2년도 못 있다가 다 육지로 나왔는데, 손 목사는 우리노회 빚 좀 갚고 오라우."
"어떻게 하면 빚을 갚을까요?"
"한 5년은 있어야지." 
"네, 목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주에 가서 7년이 되었을 때 시무하는 교회에 방 목사님이 오셨다.
"손 목사, 이젠 5년은 되었지?"
"목사님, 7년 되어갑니다."
"그래? 하 저런! 그렇게 되었어?"하시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0년이 넘도록 아주 기쁘게 제주성안교회 목회를 했다.

은퇴하고 10일 만에 러시아 선교사란 이름으로 출국하였다가 한국에 돌아와 방 목사님을 방문했을 때 잘하는 냉면 집을 가자하셔서 송추에 오후 2시나 되야 도착했다. 당신은 냉면을 거의 안 드시면서 잘하는 냉면 먹이시려고 그 먼 곳까지 가서 필자는 잘 먹었지만 목사님은 얼마나 시장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에 와서 목회할 때도 주일 저녁시간에 더러 오셨는데 한 번도 주무신 적이 없으며 바쁘다며 그 밤 마지막 기차로 올라가곤 하셨다. 차 타시는 걸 보려고 기다리면 쫓듯이 돌려보냈다. 차를 기다리며 2,30분만 시간이 있어도 의자에 앉아 그날의 일을 타이핑 하셨다. 그렇게 모아서 출판한 책이 '본대로 들은 대로' 시리즈 27권이다.

103세 장수도 하셨지만 그 장수에 맞춘 출판 책들도 103권이라고 한다. 그 바쁜 중에도 수십 명에게 글과 사진 등 정보를 발송하는 일을 최근까지 하셨다. 우리 같은 사람이 메일을 보내면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회답을 보내주셨다.

가정적으로 무척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시고 외롭게 홀로 사시면서도 목사님은 "녹슬어서 못 쓰느니 닳아져서 못 쓰겠다"는 그 좌우명대로 진실로 마지막 다 닳아져서 더 이상 남은 것 없이 하늘 아버지와 그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나라로 가셨다. 멀지 않은 그 어느 날 그 나라 주님 앞에 가서 다시 뵙겠습니다. 

2014.10.10. 방지일 목사님 가신 날
손영호 목사/ 광주양림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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