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②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 목회·신학 ] 신학명저마당

김도훈 교수
2014년 05월 19일(월) 16:18

   
위르겐 몰트만 박사
오늘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위기의 시대요, 절망의 시대인 탓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인 듯하다. 하지만 침묵이 최선은 아니다. 우리의 답도 아님은 물론이다. 침묵은 그저 절망의 무게와 깊이만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고통스럽더라도 희망을 말해야 한다. 아니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외쳐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의 말대로, 고통과 절망의 수면의 밑바닥,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 그래서 이제는 딛고 일어서야 할 밑바닥은 하나님이 아니던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말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한 세대 앞서 고민했던 신학자가 바로 몰트만이다. 그는 학도병으로 공군지원단의 고사포부대에 동원되었다. 그가 있었던 함부르크는 영국공군부대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4만 명이나 불타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모라 작전의 화염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진 친구들의 시체를 목격하였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밤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과 투쟁하던 중, 마침내 그의 얍복강에서 싸움을 걸어오던 이를 발견하고 '실존을 지탱하고, 이끌어 갈 지식'인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 당시의 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전 세계의 교회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준 책, 그 책이 바로 '희망의 신학'이다. 당시의 신학은 '신죽음의 신학'의 분위기가 신학의 혈관을 흐르고 있었다. 어디나 신학의 색깔은 창백한 회색이었다. 독일의 유명 시사 잡지 슈피겔의 말대로, '희망의 신학'은 신학의 혈관에 철분을 흐르게 하여 신학의 혈색이 돌게 한 책이었다. '희망의 신학'이 출간되자마자 놀랄만한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바르트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이 그 책을 논하여 평을 내놓았다.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수많은 신학과 교회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몰트만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그 책이 더 많이 읽히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 문화 개방적 결정, 프라하에서 일어난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 미국의 시민운동, 웁살라 WCC대회의 희망의 선언, 기타 많은 사회혁명, 반독재 운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출판 50년이 흐르면서도 여전히 그의 '희망의 신학'이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사회정치적 사건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희망의 신학' 자체의 설득력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의 자극 때문이었다. 스위스 휴가 기간 블로흐의 글을 읽은 몰트만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왜 기독교 신학은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희망은 본래 기독교의 본질적 주제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런 마음의 울림 속에서 쓴 책이 바로 '희망의 신학'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그의 고백대로 블로흐의 책을 그저 모방하거나 희망의 원리를 단순히 기독교적으로 각색하려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기독교적 희망을 기획하고 '희망의 원리'에 대응하는 신학을 전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구약성서의 약속의 신학',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신학', '홀랜드의 사도직의 신학', '이 세계를 서서히 변혁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혁명적인 윤리'와 그 외에 여러 다양한 신학의 재료들을 서로 엮어 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희망의 신학'은 단순한, 낙관적 희망을 주제로 삼은 책은 아니다. 부제가 보여주듯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그 결과에 대한 연구이다. 교회와 신학은 오랫동안 종말론을, '마지막에 대한 이론' 혹은 '최후적인 것에 관한 이론'으로 진술하면서, 교의학의 부록으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종말론을 기독교 신학의 핵심과 총체로 회복시켜 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종말론을 가능케 하는 성경의 개념은 약속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 사건을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 자신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신현현(에피파니)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약속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건이었다. 몰트만이 본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약속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몰트만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약속의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우리 종말의 선취이며 바로 약속의 사건이다.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의 절정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약속의 사건을 일으키심으로 총체적 부활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보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실재의 새창조를 위하여, 의와 영광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선포는 바로 희망의 선포이다.

이 책은 그가 말한 대로 신학의 여러 주제 중에 예수의 부활을 통한 희망에 집중했다는, 우주적 차원의 종말론이라기보다는 역사에 집중한 종말론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것이 그의 책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거나 신학계에 끼친 공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의 종말론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하여 많은 공헌과 배울 점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종말론의 강점은 바로 종말론의 실천화이다. 그는 현실 도피적 종말론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현실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말론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사회정치적 개혁에 깊은 동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김도훈 교수 / 장신대ㆍ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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