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우리 향해 '기도하라'고 다그친다"

"시대가 우리 향해 '기도하라'고 다그친다"

[ 교계 ] 잊어버린 사명, 회복하라

이용남 목사
2014년 04월 17일(목) 10:08

부활절 특집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교회, 진정성을 회복하라"
3. 잊어버린 사명, 회복하라

기도하지 않는 교회, 목사 향한 깨우침

   
 
요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 기준으로 살려고 하는 한 선지자의 모습에서 종종 하나님의 뜻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인간의 기준을 앞세우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많은 도전과 깨달음이 있어 요나서를 종종 묵상하며 은혜를 받는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다시스로 가는 요나의 길을 돌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요나가 타고 있는 배를 향하여 풍랑을 일으키셨다.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구원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요나는 배 밑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그냥 잠이 아니라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요나서에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가 기도하라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선장이 선지자에게 기도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종종 기도하지 않는 교회와 목사들을 향하여 이 시대가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요나서를 읽으며 크게 도전을 받곤한다.

1453년 회교군대가 콘스탄틴노플을 포위했다. 콘스탄틴노플은 로마와 함께 중세 기독교의 성도라고 할 수 있다. 발칸인들이 앞으로 수세기 동안 크리스찬의 지배를 받느냐 회교 지배를 받느냐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는데도 교회의 사제들이 모여서 성모 마리아상의 눈의 색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천사는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성수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성수가 오염됐느냐, 파리가 성화됐느냐 하는 문제로 싸웠다고 한다.

1917년 겨울 레닌의 귀국으로 공산 혁명 군대가 모스크바로 쳐들어와 세상이 뒤집히고 기독교 왕족과 부자와 승려와 군벌 등 125만 명이 시베리아에 피난가다 죽고 기독교의 뿌리가 뽑히는 마당에 모스크바의 한 목사(사제) 회의에서는 가운의 후드 색에 관한 문제와 축도할 때 손가락을 어떤 모양으로 펼 것인가에 대해 두 시간 반을 싸웠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교회가 이런 꼴이 아닌가?

한국교회 타락상 종교개혁 이후 가장 심각

오늘 한국교회의 타락상은 종교개혁 이후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정말 문제가 많다. 이런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정리한다면 기준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는 물질의 풍요를 복으로 보는 견해다. 신령상의 은혜나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은 외면하고 오직 물질의 풍요만이 복이라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또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느냐에 무엇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는 세상 기준의 성공을 최고의 가치인양 따르는 데 있다. 목사나 장로들도 노회나 교회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느냐가 그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일꾼이냐가 결정된다. 신실하게 기도하며 말씀을 바로 깨달아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별로 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냥 세상 기준으로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셨고 섬기러 왔다고 하셨는데 교회 안이나 교회 기관에서 섬김을 받는 것만이 크게 성공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셋째는 하나님의 표준이나 시선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인정을 더 크게 보는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생각하기보다 사회나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교회가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존재하기에 사회를 외면하고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찾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또는 사회가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에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리스도인이란 땅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사는 사람들이다. 인간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기준으로,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의 기준으로, 그리고 인간이면서도 이 세상의 어떤 규범이나 질서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하여 따르며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비록 세상에 있으나 하나님의 기관으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존재의미를 잃고 있지 않은가?

'좋은 목회자' 있어야 '좋은 교회'

먼저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글에 보면 "첫째,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좋은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좋은 목회자란 건전한 교리에 대한 풍성한 지식과 뜨거운 체험적 신앙을 모두 겸비한 사람이다. 지식과 체험의 양면을 균형 있게 갖춘 경건한 인격 소유자를 목회자로 모신 교회야말로 참으로 지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교회일 것이다." 좋은 목회자가 있을 때 좋은 교회가 된다. 교회가 좋은 교회냐 그렇지 못한 교회냐를 말할 때 제일 첫째가 목회자다.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교회의 질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더 교회답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들의 건강하고 바른 영적, 지적, 인격적 자질이 필요하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목회자들의 각성이 최우선이다.

다음으로 교회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에밀 브루너는 "교회는 곧 선교이다. 불은 붙는 것으로 존속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로만 존속한다"고 했다. 교회는 선교가 이루어질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성장한 교회만을 붙들고 여유만만하게 즐기고 있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불신자가 있더라도 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존재가치가 있다.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한참 성장할 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부러움을 샀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인의 감소와 함께 점점 사회의 외면을 당하고 있다. 설상가상격으로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전처럼 성수주일을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신년맞이 첫 주일이나 부활주일, 또는 성탄절에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세례 받을 때 나오고 죽어 장례할 때 예배하는 일이 고작인 사람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의 존재 이유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전혀 힘을 쓰지 않고 자리싸움에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항상 변화하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

스피조스 조디아티 목사가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앙 잡지 '풀핏'(Pulpit)에 자신의 목회 체험을 바탕으로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에 대한 생각을 기고한 적이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소리로 늘 시끄럽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예산을 초과해서 씁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과 새 이름을 알기 어려워 애를 먹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에 바쁩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움직이려고 들지 않습니다."

'교회성장학'이란 새로운 분야를 이끌어 낸 맥가브란은 "교회는 끊임없이 잃은 양을 찾아 그들을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교회를 번식시키는 일이며 하나님 가족을 재생시키는 일"이라고 하면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두신 이유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복음 전파에 더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전파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윌리암 템플이 정의한 "교회는 비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가 존속하는 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명제이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회원들만을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교회 밖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이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말 아래 두기 위함이 아니요 등잔대 위에 두어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된 교회는 보다 더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세를 갖고 적극적인 섬김이 있어야 한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힘을 내라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자. 그 안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각색 동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150일 동안을 한 방주 안에서 먹고, 배설하며 지낼 때 그 안이 썩고 냄새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지독한 환경을 탓하고 그곳을 탈출하거나 벗어날 수 없었다. 그냥 그들은 그 방주 안에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가면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두들겨 맞는 교회 역시 냄새난다. 부패된 냄새가 지독하다.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거나 외면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 안에 있어야만 한다. 노아의 식구처럼…. 이곳을 통하여 생명줄이 이어져가고, 이곳을 통하여 영혼의 꼴을 먹으며, 영혼의 쉼을 얻고, 이곳을 통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있어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방주처럼 비판과 비난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워도 교회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 주님께서 인류의 최대의 적인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죽음의 막강한 권세를 깨트리시고 새 생명으로 일어나셨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도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힘을 내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벗이 되기를 안달하지 말자. 세상에 속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면서도 세상의 벗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벗이 됨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를 세우신 존재이유를 바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용남 목사 / 장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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