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4월 7~12일

[가정예배]4월 7~1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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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1일(화) 16:24

월-시편 묵상
본문 : 시 22:1~21
찬송 : 144장 

기다리는 봄처럼,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사순절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좀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을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가 있고,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육체적 고난과 시험이 자신의 십자가였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받은 핍박으로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서 하나님께 울부짖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의 기도는 마치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를 연상시킨다. 다윗은 기도한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과거 조상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셨던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늦어질 수도 있지만 기도하는 자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육신적인 고통이 너무 힘들어 정신적으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고 했다. 이렇게 자기 자신도 지탱하기 힘든데 다윗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한 마디로 다윗은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었고 조롱거리가 되었고 심지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수모를 겪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아픔과 괴로움을 안고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한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고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소중한 그릇이다. 다윗은 지금의 자기 심정 그대로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내 모습 그대로 주님께 기도함으로 십자가 앞에 한 발자국 다가서도록 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숨김없이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동성 목사
/경당교회


화-로뎀나무 아래에서 만난 하나님
본문 : 왕상 19:1~8
찬송 : 415장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광야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죽기를 청하고 있다. 엘리야는 지금 영육이 지쳐있고 탈진이 온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합과 이세벨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청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갈멜산의 대승리는 엘리야가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엘리야와 함께 하시고 엘리야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다. 엘리야에게 고정된 시선을 재조정하여 하나님께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엘리야가 하나님만 신뢰하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다. 둘째, 엘리야는 하나님이 아닌 아합과 이세벨을 보았고 그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탄의 영적 역습을 조심하라. 사탄의 시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갈멜산에서의 영적 승리에 도취하여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세상을 보고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실패하고 만다.
 
광야 로뎀나무는 마치 인생의 종착역,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와 같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다. 광야 끝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첫째,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추격자이시며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가장 좋은 것, 더 좋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내가 가장 괴로울 때 내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신다. 광야의 식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넷째, 하나님은 계속되는 나의 실패도 승리로 바꾸어 주신다.
 
로뎀나무는 십자가다. 로뎀나무 아래는 끝까지 한 영혼을 찾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다. 실패한 인생을 자비와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시며 전능하신 하늘의 도공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시 온전하게 재창조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자리다. 하나님의 사역과 사명 앞에 지쳐 있는 영혼들이 참된 쉼과 안식을 얻는 자리다. 영혼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생명의 양식통을 채워주시고 광야의 식탁을 차려주시는 장소이다.
 
오늘의 기도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영적탈진의 원인을 알게 하시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나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사명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재한 목사
/대구신은교회


수-행복하십니까?
본문 : 요 15:12~14
찬송 : 446장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관계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적인 소유와 누림으로 아무리 만족한다고 해도 그 행복을 나눌 대상이 없다면,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 삶의 자리에서 수많은 만남들이 이루어지는데 그런 모든 만남들 속에서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은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여러분은 행복한가?

만일 우리의 삶에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비뚤어진 관계가 있다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관계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자기 혼자 누리는 것,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성경은 오직 관계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그 관계 안에서 우리가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을 성경은 진정한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 여러분은 행복한가? 그 피로 말미암은 축복이 우리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고 그 피의 권세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고 있고 그 피의 공로를 찬양하며 사는 백성이 되었는가 묻고 싶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성경의 기준으로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 예수님과 물질,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을 때 망설임없이 예수님을 택하는가? 예수님을 믿음이 행복이라고 말하며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그 나라를 향하여 치열하게 달려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교회 안에서는 말하는데, 실제 삶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정말로 원하는 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면서 다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식만 그렇지 않은 척, 고상한 척, 예수님을 따르는 척하는 사람이 많다. 이론으로 알고 있고 입술로 말하는 내용만큼 실제 삶이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라는 그 벽을 넘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여러분이 가진 행복의 기준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인가? 지금 이 질문을 우리 마음 비석에 새겨서 나의 실제 삶 그 현장에서 실천적인 답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가 비로소 행복해지게 되었는데 이제 우리의 그 구별된 삶을 통해서 소중한 행복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밑으로 나와서 삶을 검토하며 주님의 요구와 기대에 부합하는 자 되기를 힘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병목 목사
/해안중앙교회


목-알곡을 더욱 튼실하게
본문 : 마 13:36~43
찬송 : 300장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공존한다. 세상에는 천국에 속한 이들과 악한 자에 속한 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가라지는 밀과 너무나 흡사해서 전문가조차도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결국 열매를 맺을 즈음에야 비로소 구별할 수 있다. 성질 급한 농부가 가라지를 뽑으려고 덤벼들다가는 가라지도 잘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뿌리가 주변으로 널리 퍼져 있어 밀조차 뽑아버릴 위험이 있다. 가라지는 독초이며 먹어서는 안되는 독 보리이다. 그러나 추수 때에는 밀과 독보리를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다. 밀은 튼실한 이삭을 가득 달고 점점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뻣뻣하게 서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성급하게 가라지를 뽑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마귀가 뿌려놓은 가라지의 존재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진 가라지의 종말에 대해서도 가르쳐 보여주신다. 그러나 본문 41절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칫 잘못하여 범할 수 있는 일을 경계하고 계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심판하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는 누구나 쉽게 다른 사람들을 악한 가라지라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쫓아 내버리고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는 일은 주님이 보내신 천사들에게 맡기신 일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가라지를 분별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가라지를 뽑아야 될 때가 아님도 알아야 한다.
 
본문 40절에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했다. 오직 심판의 시기와 심판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그렇다고 마냥 세상에 일어나는 악하고 불의한일에 모르는 척 눈 감고 때로는 실망하여 주저앉아 있어서도 안된다. 정의를 세우고 선을 행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당면한 일이다.
 
지금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의 마음과 발자취를 더듬는 사순절기간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미 얻은 승리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죄를 짓게 만드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하늘나라에서 추려 내어 불타는 아궁이에 던지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을 약속하신다.
 
판단함과 정죄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에 드려질 알곡을 더욱 튼실하고 건강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도록 하자.
 
오늘의 기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 심판하고 정죄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알곡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더욱 튼실하게 가꾸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현 목사
/참사랑교회


금-인생의 풍랑을 이깁시다
본문 : 막 4:35~41
찬송 : 388장

우리 인생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순풍에 순항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풍랑을 만날 때도 있다. 요나도 풍랑을 만났고, 사도바울도 풍랑을 만났고, 본문에 제자들도 풍랑을 만났듯이 우리도 때때로 가정의 풍랑, 건강의 풍랑, 자녀의 풍랑, 물질의 풍랑, 사업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다.

소원의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하려면 어떻게 인생 항해를 해야 할까?
 
첫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지금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고 있었으나 풍랑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어도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할 때도 있고, 자녀들 문제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 인생 항해에 있어서 '풍랑을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항해하는가?, 예수님 없이 항해하는가?'이다. 예수님을 모시고만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탄 인생의 배는 절대로 파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풍랑을 넘어 안전한 인생항해 길이 되길 바란다.
 
둘째, 예수님을 깨우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모시고 항해하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다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제자들이지만 더 큰 어려움만 당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빨리 깨울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 곤경에 처했을 때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깨우는 것, 자신을 의지하고 도움 청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풍랑은 그냥 잔잔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도와주실 줄 믿고 풍랑을 만났을 때 기도로 주님을 깨우자. 주님께서 잔잔케 해주실 것이다.
 
셋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풍랑이 잔잔해진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데,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였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경건이다. 하나님 경외를 망각하는 것이 죄의 출발선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진작 예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호와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신다(시33:18)"고 약속하셨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사순절에 하나님 경외의식으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주님을 모시고 기도하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풍랑이 잔잔해지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기도와 기다림
본문 : 대하 20:12, 행 1:14
찬송 : 364장

기도에도 단계가 있다. 피상적이고 깊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도 그렇게 받으신다. 하지만 내 생명을 걸고 마음 속 깊이 우러나와, 기도에 내 인생을 내던져보면 하나님도 다르게 반응하신다. 그때부터 우리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문제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냐는 여유까지 생긴다. 기도만 올바로 시작해도 문제는 거의 절반이 해결된 셈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기도와 기다림'이 아닌가?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기도한 후에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조금 해보고 안되면 무너져 버린다.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 기도생활을 멈추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가 멈추면 문제해결이 안된다. 하나님의 능력도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를 하지만 자꾸 응답이 지연될 때, 그것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빨리 응답받고 싶은데, 일은 계속 꼬이니, 주님이 언제 응답해 주실지 애가 탄다. 그래서 중도에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이때 필요한 한 가지 지혜가 있다. 믿음으로 기도한 후에 그냥 잊어버리면 된다. 기도한 후에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어리석음과 방치가 아니요, 기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욕심은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로 만족하고 있다면 기도제목들은 우리의 우상일 수 있다. 이럴 때는 응답이 더디다. 그러나 '그래! 난 하나님만 있으면 돼!'라며 그 문제를 잊고 살면 기도는 어느새 응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대단한 인내의 사람이다. 그는 기도응답을 무려 120년간 기다렸다. 노아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은 하나님께 맡기며 방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노아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기도는 우리가 쓰러져 죽을 것 같아도 다시 일으켜 주는 힘이다. 기도하다 포기했는가? 기도의 분량이 찰 때까지 다시 매달리라. '이 길만이 내가 살 길이다'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기도하지만 진척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희망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움직이고 계신다.
 
오늘의 기도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삶의 어둠 속에서도 주께서 비밀스런 장소에 나를 위한 보물을 숨기셨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요한 목사
/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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