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31일~4월 5일

[가정예배]3월 31일~4월 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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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26일(수) 16:26

월-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
본문 : 요 9:1~41
찬송 : 150장

벌써부터 활짝 피었던 생강나무 꽃은 한숨을 돌리고 있고, 개나리들이 꽃망울을 열고 봄볕을 즐기고 있다. 까만 돌콩 같던 산개구리 알들은 올챙이가 되어 헤엄을 치고 있고, 부리 끝이 노란 백로들이 느릿느릿 하늘을 난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볼 것 많은 봄이다.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은 이 사람 저 사람과 티격태격 하신다.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분주히 밥을 먹여주시던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주님이시다. 바리새파 사람들, 사두개파 사람들, 제사장들, 심지어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도 날을 세우신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을 그리도 모질게 했을까? 주님께서도 봄볕을 맞으며 봄꽃의 미소와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셨을 터인데, 어찌 이리도 한 치의 빈틈도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걸까? 고향 마을 갈릴리의 들과 호수, 가족들과 동무들의 웃음소리가 그리워서였을까? 늘 길을 찾아 떠도시던 여정이 너무 오래여서였을까? 아니면 당신의 길이 결국 처연한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음에 불쑥 화가 치미셨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주님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오늘 말씀만 해도 그렇다. 그저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고쳐주셨으면 그것으로 그만일 것을 공연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말싸움을 하신다. 물론 시비를 따지자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먼저 수작을 건 셈이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그쯤이야 그냥 웃으며 넘기실 만도 한데,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하시며 바리새파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시고야 만다. 꼼짝없이 당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 시골 선생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서 율법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고 있는 우리를 죄인 취급하다니, 이건 뭐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덥석 물어버리는 미친개에 물린 기분이었을 테다. 지켜보는 우리야 속이 후련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바리새파 사람들을 불쌍하게 볼 것은 아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율법을 입에 달고 살지만, 늘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 들추는 일만을 할 뿐이다. 메시아가 나타나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뜨게 하는 예언자가 예언한 기적을 재현했어도, 그들은 눈을 뜬 앞 못 보던 사람도, 예수님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예수님을 회당에 못 들어가도록 손을 써놓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힘을 부린다. 온갖 꼼수를 부리며 생명과 평화를 향하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죄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당신의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를 비추어 봅니다. 우리가 지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걸어가시는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죄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진형 목사
/청지기교회


화-주님, 저는 아니지요?
본문 : 마 26:17~29
찬송 : 311장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만찬 중의 일이다. 예수님은 정성껏 준비된 유월절 식탁에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예수님만이 그 자리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탁이요, 만찬 후 원수의 손에 잡히게 될 것이요, 어떻게 고난당할 것인지,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알고 계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이 반응한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주의 만찬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을 살펴보자.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이 유월절의 기념은 사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으로 마지막 유월절이 되고 그때부터 유대인의 유월절 기념은 그리스도의 성찬예식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같이 주의 만찬은 죄인에게 호소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만찬의 행사를, 제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그분은 유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성찰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제자들은 제각기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한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열한 사람이 똑같이 떨리는 음성으로 예수님께 물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되지'라며 다짐을 한다. 바로 그때다. 가룟인 유다는 지적을 받고서도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한다. 주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제자가 선생님을 팔고, 자식이 부모를 해하고, 교인이 목사를 고발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악한지를 모르는 세상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성만찬을 받으라고 하신다. 성만찬의 떡과 잔은 주님의 몸과 피로 '언약의 피'이다. 주님은 유월절을 주의 만찬으로 대신하셨다. 주의 만찬은 억압과 예속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새 규례이다. 주님은 자신을 인간의 죄를 위해 죽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선언하신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이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가 인류의 죄를 속하는 구속의 피가 된 것을 확신하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바로하자. "주님, 저는 아니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저는 약합니다. 주님은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구원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남식 목사
/남원산성교회


수-신앙의 조율과 연주
본문 : 딤전 2:1~4
찬송 : 342장

조율되지 않은 악기는 사용할 수가 없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잘 조율된 상태를 유지해야 멋진 신앙의 하모니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신앙생활의 처음은 대체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시작한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다. '구원'과 '진리에 이름'에는 차이가 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권리이지만,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수고가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과 '단정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 경건과 단정함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사야 32장 1절은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게 되면,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사32:5)"라고 말씀한다. 공의로 통치하는 세상은 더 이상 악에 물들고, 악을 일삼는 자를 존귀한 자로 부르지 않고, 우둔한 자를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잘 조율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멋진 연주를 하기를 기대한다.
 
그 도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이다. 이 네 용어는 기도라는 범주 안에 있으면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간구는 '데에시스'로 사람의 요구를 구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프로슈케'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를 말한다. 도고는 '엔시스'로 하나님께 탄원하듯 간절히 하는 기도이다. 감사는 '유카리스티아'로 억지로가 아닌 감사로 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자세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신다. 조율된 성도는 이 네 가지 무기로 하나님의 감동을 끌어낸다.
 
다윗은 세상의 군왕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할 때, 기도하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네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가르친다. 교회는 성도가 모여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의 하모니는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평안을 맛보게 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 모두는 잘 조율된 신앙으로 세상의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멋진 연주자가 되어야 하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잘 조율된 신앙으로 세상의 평안과 영원한 상급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홍무열 목사
/동대천교회


목-믿고 기다리라
본문 : 삼하 5:22~25
찬송 : 425장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블레셋 군대가 다윗을 치려고 몰려왔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는 쉽게 물러나지 않고 얼마 후 또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더 큰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이다. 다윗은 이번에도 하나님께 기도한다. 다윗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먼저 여쭙는 기도의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과 상의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공격하라"고 하셨다. 다윗과 부하들은 그래서 기다렸다. 하나님 말씀대로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적들은 지금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다. 코앞까지 몰아 닥쳤다. 한시가 급하다. 그러나 다윗과 부하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때를 기다린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다윗은 기다렸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다. 그랬더니 진짜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다윗과 군사들은 칼날 앞에 그들의 목숨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기다리니까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일어서니까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시며 대적들을 물리쳐주셨다. 대승리였다.
 
비슷한 사건이 사울 왕에게도 있었다. 사무엘상 13장을 읽어보면 사울 왕도 블레셋과 전투를 벌인다. 그때 사울 왕도 기다렸다. 하지만 사울 왕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기다림에서 실패하고 만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결코 쉽지 않다. 아브라함도 기다림에 실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지금 뭔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을 기다리라. 다윗처럼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라. 믿음으로 기다리면 반드시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다윗처럼 기다림에서 승리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께 구한 것은 믿고 기다릴 수 있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성철 목사
/운암신안교회


금-갑옷을 벗을 때
본문 : 왕상 20:1~12
찬송 : 288장

아합은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이다. 그의 부인 이세벨은 이스라엘을 바알 신 숭배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아합을 성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악한 왕 아합을 아람왕 벤하닷이 연합군을 거느리고 공격하는 중이었다. 오늘 1차 전투이후에 벌어진 2차 전투에서 아람 사망자가 12만7000명인 것을 본다면 기본이 2십만 명이 넘는 적군이 쳐들어온 상태에서, 아합에게는 청년 230명과 7000명의 군대밖에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를 자랑하는 벤하닷은 사자를 보내 아합에게 요구한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아합왕의 가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빼앗아가겠다고 했을 때 일국의 왕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인 아합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는 아내와 자녀, 모든 재산을 벤하닷에게 넘기겠다고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벤하닷의 요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합 집안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아내와 자녀, 재산까지 약탈하겠다고 했을 때, 아합에게 남은 최후의 자존심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운다. 그리고 1차와 2차 전투 모두 대승을 거둔다. 갑옷은 전쟁의 상징이다.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전투에 출전한다는 뜻이요, 갑옷을 벗는 다는 것은 전투가 끝났다는 말이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벤하닷은 다 이긴 것처럼 큰소리를 쳤으나, 아합은 갑옷을 벗을 때 큰소리 치는 자가 진짜 승리자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가보자고 한다. 아합이 무엇을 믿고 갑옷을 벗을 때 보자고 하였을까? 그 해답이 13절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주의 종 선지자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합에게는 천군만마보다 더 위대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세상은 규모의 경제를 요구한다. 대기업, 대형 교회 앞에 우리의 모습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으니, 이렇게 악한 왕 아합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거늘, 선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고자 몸부림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겠는가. 멋진 승리로 보답해 주시리라 믿는다. 우리를 향해 큰소리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갑옷을 벗을 때 보자"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복음을 증거하는 멋진 사역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갑옷을 입기도 전에 세상에 잘 보이려 노력하기 보다, 갑옷을 벗을 때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중호 목사
/수원명성교회


토-요나와 큰 물고기
본문 : 욘 1:15~17
찬송 : 369장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 390년에 왕이 되어 22년간 고조선의 옛 땅 마한, 진한, 변한(만주)을 다시 찾았다. 중국 만주는 독도가 우리 땅이듯이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고 우리 땅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이 만주 땅을 다시 찾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에 우물정(#)자는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점령할 때 깃발에 새긴 글자다. 이것은 정복과 소유를 상징하는 고구려의 대 국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만주 땅을 중국에게 빼앗겼을까? 가장 큰 이유는 46만명의 고구려인들이 만주사람들을 교화시키지 못해서이다.
 
여호수아 1장 4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해 나온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사실 광대한 땅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 현재 갈갈이 찢어지고 분쟁과 전쟁의 화약창고가 되었다. 이것이 중동전쟁이다. 고대제국 바벨론, 앗수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다. 그런데 그 광활한 땅을 왜 차지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본토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지역을 선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이 수천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어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가 적국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선민의식이며 요나의 고집이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해서 결코 전도하지 않는다.
 
요나는 다혈질이다. 성격이 급해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친다. 또한, 다변적이다. 시원시원하다. '나의 연고니라'고 말할 수 있는 다변적 사람이다. 당신이 제비뽑기에 뽑혔다고 뱃사람들이 말하자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열려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을까? 이유는 첫째, 세계선교의 시작을 알리셨고, 둘째,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지 않으면 다시 이스라엘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악한 행동을 고침으로 이스라엘에 평화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역과 세계를 복음화 시킬 때 희망이 있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열려진 마음을 주시고 복음을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지역, 선교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용숙 목사
/보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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