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24~29일

[가정예배]3월 24~29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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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9일(수) 10:30

 

월-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본문 : 마 6:25~34
찬송 : 382장

평생토록 피라미드를 건축한 이집트의 파라오나 수많은 희생의 토대 위에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처럼, 솔로몬왕도 통치 기간 40년 대부분을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는 데 보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솔, 므깃도, 게셀 지방의 성들과 병거 성, 마병 성 등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솔로몬의 주도형 기질은 기브온 산당에서 소 일천 마리를 한꺼번에 번제로 태워 제사 드리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열왕기상 8장의 성전 낙성식에 보면, 선지자나 제사장 없이 왕이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진다. 솔로몬 자신이 제사 드리고, 대표기도도 하고, 축도하고, 백성들에게 음식도 나누어주고, 절기 선포까지 한다.
 
이렇게 일 잘하고 능력있는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까지 갖춘 완벽한 왕이었다. 두 명의 여인이 갓난아이 때문에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쪼개 반씩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진짜 엄마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내린 판결이었다.
 
이런 솔로몬이라면 다윗 왕 보다도 더 훌륭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들에 핀 백합화의 영광보다 못한 솔로몬의 영광"을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솔로몬의 결정적인 약점인 사람을 향한 분노를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이복형인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의 젊은 처녀(동녀)였던 아비삭을 달라고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를 통해 청원한 사건이 있었다. 왕위 계승 문제로 아도니야와 미묘한 관계에 있던 솔로몬은 이 아비삭 사건을 통해서 자기 형인 아도니야를 단칼에 죽인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빌미로 아도니야를 왕위에 앉히려 했던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연속적으로 숙청한다. 이렇게 한 번 폭발하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까지 모두 폭발해 버린 사람이 솔로몬이었다.
 
솔로몬은 자기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인생 말년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글을 썼다. 그것이 전도서이다. 앞만 보고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던 솔로몬 인생의 최후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해 아래서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이 헛되다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들에 핀 백합화의 영광보다도 못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고 허물어질 솔로몬의 영광을 좇지 말고, 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위대한 사역자로 자리매김 하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이 사람들 앞에 위대하게 보이려는 헛된 야망보다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중호 목사
/수원명성교회


화-나의 연고니라
본문 : 욘 1:12~17
찬송 : 217장

현재를 아름답게 살지 않으면 내일의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선지자 요나가 뱃사람들 앞에서 '이것은 나의 연고라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고백함으로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고집을 부리며 이 고백을 하기 어려울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다윗은 '내가 득죄하였나이다'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떠난 사울왕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고 했지만 뱃사람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다. 이방인도 의인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발강은 바벨론에 있는 강이다. 이 강가에 에스겔과 이스라엘 포로들이 살면서 함께 많이 울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포로가 된 것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울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귀환의 대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울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 16절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는 구절을 탈굼역에서는 이렇게 해석했다. '그들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희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이 다시스로 가지 않고 욥바로 귀환하여 개종자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왜 다시스로 가지 않고 욥바로 돌아갔을까? 배에 선적된 물건을 바다에 던져버렸기 때문에 다시스로 갈 수 없게 되어 욥바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욥바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많이 태어났다.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는 요나를 잡아두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여호와께서 예비하사'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이 말은 '여호와 이레'라는 뜻이다. 요나가 '나의 연고니라'며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즉 '여호와 이레'는 만사형통이다. 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신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는 도망할 길이 전혀 없다. 그곳에는 요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요나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기도뿐이다. 그래야 큰 물고기 뱃속에서 나올 수 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요나는 거기가 죽음의 무덤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곳에 바로 하나님이 계시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내려놓는 용기를 주시옵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용숙 목사
/보성교회


수-염려하지 말라
본문 : 마 6:25~34
찬송 : 357장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세 가지 질문을 한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새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높일 수 있느냐?"이다. 펜티코스트는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유가 '부적절감'때문이라고 한다. 주어진 상황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염려한다는 것이다. 염려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못 느끼면 자연히 찾아온다. 초대교회는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에게 붙여주는 별칭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사는 자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염려에 익숙해져 있다. 미리 준비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염려도 발전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염려에 대한 프로 근성을 키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염려로 해결안되는 환경을 만나는 것이다. 동료가 배신을 하고, 정적과의 오해와 음모를 겪으면서 염려가 가중될 때이다. 이상구 박사는 중환자들의 공통점은 염려를 잘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확실하고, 성실하고, 치밀하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지만, 염려로 해결 안되는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병들고 지친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할 때 찾아온다. 들의 백합화가 꽃을 피우게 하시고, 공중의 새가 평안히 살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기에 사람들은 근심하고 고통한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한다. 베드로는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한다.
 
본문은 성도가 이방인과 같은 고민을 하지 않기를 권면한다. 이유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새보다 낫고, 백합보다 나은 우리가 세상적인 염려에 빠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들보다 더 평안하고, 형통케 해 주신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염려를 이기는 방법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의 기도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심과 더해 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염려를 이기고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홍무열 목사
/동대천교회


목-광야의 은혜
본문 : 출 17:1~7
찬송 : 352장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실 물도 없는 르비딤으로 이끌어내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에 마실 물이 없다. 복된 곳으로 인도하실 줄 알았는데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것일까?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훈련을 통해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훈련 없이는 결코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훈련을 받아야 정금 같은 믿음의 군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훈련받을 때 꼭 주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불평과 원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다고 원망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믿는 사람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느긋하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한다. 분명 르비딤에는 물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호렙산 반석 아래 200만명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숨겨져 있었다. 모세가 반석을 치자 물이 터져 나왔다. 믿음은 바로 이 숨겨져 있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생각지 못한 복을 반석 아래 감추어 두고 계셨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하나님의 훈련은 믿음의 훈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르비딤에서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이 꼭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르비딤에서 생수를 마신 이스라엘 백성은 곧바로 광야의 폭군 아말렉을 만난다. 아말렉은 광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전쟁과 살인과 약탈로 살아오던 자들이다. 한데 이들과 싸워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승리의 원인이 무엇인가? 호렙산 반석을 터뜨리고 나온 생수를 마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 호렙산 반석을 그리스도라 했다. 반석이 그리스도라면 반석을 친 모세의 지팡이는 십자가다. 반석에서 솟는 생수는 예수님의 보혈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겨질 때 온 인류를 구원하는 보혈의 피가 흘러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 피를 마신 자마다 아말렉과 같은 사망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다. 혹 지금 광야에 있는가? 광야가 은혜의 장소임을 알라. 오직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만이 광야로 이끌림을 받았음을 알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광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호렙산 반석 아래 샘이 있음을 아는 영적 안목도 주옵소서. 아말렉과 싸워 이기는 믿음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성철 목사
/운암신안교회


금-버려진 물동이
본문 : 요 4:21~30
찬송 : 309장

집 안으로 찾아오는 아침의 고운 햇살이 점점 밝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바야흐로 춘분을 지낸 계절. 이제 들판에 돋아난 냉이, 달래, 꽃다지, 쑥들의 여린 잎들이 낯설지가 않다. 하나님의 손길 아래 하늘과 땅이 나누어주는 사랑이 이렇게 확연한데, 사랑을 바라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발걸음은 여전히 낯선 곳을 떠돈다.
 
요즘 인문학 공부가 물이 올랐다. 동양 고전, 철학, 심리학, 교육학,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머물러 깊게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앞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신중한 걸음을 걷게 하는 인문학 강의들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디로든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들이 가진 하나의 마음은 목마름이다. 사람들은 목이 마를 때 자신의 목을 축일 수 있는 곳, 우물을 향해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들게 된다. 목마름을 없애주는 바로 그 우물가에서, 오늘 주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주님은 뜬금없는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여인이 하루의 삶을 담보하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알게 된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들에게 달려갔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사람이 먹을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점잖게 타이르신 바로 그 장면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밥 때를 잊고 모여들었다. 보다 못한 주님께서 이야기를 멈추시고 사람들을 둘러앉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먹이셨던 것이다.

짐짓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에 지낼 것인가 인 듯 보여도, 우리는 온전한 진리에 목말라 나의 모든 것을 내어버릴 수 있는 거룩함을 향하는 존재이다. 사실 우주의 이치란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로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신비함을 지닌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정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은 우리의 태양계가 먼 옛날 한 초신성의 폭파로 인한 잔해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도 결국 한 줌의 먼지라해도, 신비롭게도 우리는 그 먼지들의 조합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물동이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참된 모습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버려두고 간 주인 잃은 물동이를 바라보시며 흐뭇해 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의 물동이를 맑고 깨끗한 물로 채우려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진형 목사
/청지기교회


토-예수의식으로 살자
본문 : 마 16:21~28
찬송 : 456장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이다. 이 예고 앞에 베드로의 반응은 낙제 점수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혹독한 꾸중을 듣는다. 오늘 내가 들어야 할 꾸중은 무엇일까? 왜 그 같은 꾸중을 들어야 할까? 또한 꾸중을 면할 방법은 있을까?
 
오늘 우리 크리스찬들의 위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극한 칭찬으로 베드로와 그 일행을 고무시키셨다. 그것은 제자도로서 예수님의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해졌다고 판단하시고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메시아 사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 부족과 소통의 부족함 때문이다. 예수님의식의 상실이다.
 
그 이해에 대한 행동은 무엇인가?
 
주님의 말씀, 곧 고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신감으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자기를 제어하고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세상에서 교회와 크리스찬이 실패하고 그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은 말은 멋지게 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삶의 부재이다. 세상에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 소통에 따른 자기변신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주님의 음성을 세상에 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행동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천이 넘어지고 만이 넘어져도 가야할 길이 있는가? 베드로에게 혹독한 꾸중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권세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고난의 길임을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종종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서슴없이 해치운다. 늦더라도 정직하게 차근차근 살아야 한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성공에서 보람으로, 축복에서 형통으로 시간과 싸우면서 외길을 걸어가야 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 시대를 구원할 분은 예수님뿐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변화시키려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예수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따르는 기쁨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남식 목사
/남원산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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