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17~22일

[가정예배]3월 17~22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4년 03월 12일(수) 10:43

월-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나요?
본문 : 요 3:1~17
찬송 : 79장

십자가의 언덕을 향하시는 주님 생각에 마음은 무겁기만 한데, 동산의 속없는 봄꽃들은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미 활짝 피어버린 생강나무 꽃을 따라 개나리가 기지개를 펴더니, 낮은 회양목도 보일까말까 작은 꽃을 피워 꿀벌들을 불러 모은다. 하긴, 이 먹먹한 사순절 동안 봄꽃들의 위로라도 없으면 어찌할 뻔 했을까? 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따스한 배려일 터이다.
 
선생님인 니고데모가 선생님인 예수님을 찾아온다. 자신도 선생인데,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구하러 찾아온 니고데모의 정직함과 올곧음이 엿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 선생님의 가르침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도, 바람처럼 존재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말씀도 선뜻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학생은 정말 답답하다.
 
답답하기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바리새인이었다면 진즉에 모진 말씀으로 내쳐버렸을 터이지만, 이렇게 진지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찾아온 제자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선생이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타박은 하셔도 말씀에 애정을 담아 설명을 이어가신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16절과 17절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진정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 이 우주가 만들어졌을까? 왜 이 지구가 생명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을까? 왜 우리가 한 가족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을까?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기쁨과, 고통과, 애정과, 슬픔을 안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이 모든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따스한 미소로 다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신다. "너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니?"
 
니고데모에게 물음에 대한 답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니고데모의 존재를 위해서라도,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리고 니고데모를 향한 그 안쓰러운 마음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언덕을 향해 걸어가신다. 오늘따라 유난히 주님의 뒷모습이 참 크고 듬직해 보인다.

오늘의 기도
 
주님, 포근한 봄 햇살과, 피어나는 봄꽃과, 맑은 새들의 노래 소리로 문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진정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진형 목사
/청지기교회


화-하나님의 가지치기
본문 : 요 15:1~11
찬송 : 370장

필자가 사는 지역 과수 농가에 가지치기와 퇴비 거름주기가 한창이다. 톱으로 자르고 전지가위로 자르기를 한다. 이마에 흘린 땀을 훔치는 모습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한다. 오늘 본문은 포도나무 비유로 하나님의 가지치기 이야기이다.
 
첫째,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어떤 가지에 행하게 될까?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포도나무라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농부로, 우리들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필요한 가지, 죽은 가지, 병든 가지는 잘라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가 충실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신다. 그렇다면, '열매'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의 결합의 결과로서, 날마다의 수고 속에서 우리에게 하도록 주어진 일 속에서의 신실함의 열매이며, 모든 불경건한 것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부인이며, 시련과 시험에서의 견고함과 인내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복종, 겸손과 회개로부터의 열매이다. 여러분이 맺지 못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여러분이 맺지 못한 열매들이 바로 가장 귀한 열매들이다. 그러기에 농부이신 하나님은 가지치기를 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단호하다.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쓰레기를 가장 소중한 것처럼 간직하며 살며, 우리의 정력과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께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면 잘라버려야 한다. 자르는 데는 아픔이 있다. 이 아픔 때문에 우리들은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자기스스로 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자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위대한 조각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에 들어갈 때 도구들로 사정없이 불필요한 부분을 자르고 쪼아내는 것과 같다.
 
셋째,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농부는 탐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불필요하거나 좋지 못한 것들은 미리 잘라 버린다. 반면에 남은 가지에 대해서는 약을 뿌리고 종이로 싸주고 수고하여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준다.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용솟음치는가? 기쁨이 충만한가? 기도 응답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화를 받고 변화되었는가? 예외가 없다.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분이나 요소들을 담대하게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가지치기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 철저히 붙어있어야 열매가 있고, 능력이 있고, 위로가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남식 목사
/남원산성교회


수-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본문 : 고전 2:1~5
찬송 : 259장

지금 고린도에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도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고 있는'상태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도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여 심히 떨었다는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도바울은 원래 밥을 굶는다고 약해질 사람이 아니다. 물질이 없다고 두려워 할 사람도 아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다고 떨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실제로 고린도에 오기 몇 달 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처녀를 고쳐주고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묶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사도바울은 두려워 떨기는커녕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오히려 두려워 떤 것은 빌립보 간수였다. 옥문이 흔들리고 간수장이 두려워 벌벌 떨 때에 바울은 담대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고린도에 와서는 왜 두려워 떨었을까? 물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명예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몸이 병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떠나신 것도 아니다. 다만 아테네에서의 사역 실패가 오늘 고린도에서 사도바울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접근할 때, 사도바울은 아테네에 교회를 세우지 못한다. 그리고 고린도에 와서는 용기를 잃고 천막 만드는 기술로 생계를 유지하며 실라와 디모데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고 사자후를 토해내야 할 주의 사도가, 회당에서 쩌렁쩌렁 십자가를 증거해야 할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야 할 대 사도가, 아굴라부부 두 사람을 놓고 천막을 만들며 소곤소곤 복음을 전하면서 소 사도로 전락하고 만다. 그때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용기를 얻은 바울은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낳게 된다.(고전 4:15)
 
과거의 작은 실패 하나가 우리 사역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환경이 우리를 약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환경을 초월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용기를 얻기 바란다. 사람의 말과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믿기 바란다. 2000년 전 사도바울을 통해 역사하셨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은,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멋지게 승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중호 목사
/수원명성교회


목-감사 소통
본문 : 욘 2:1~10
찬송 : 545장

오늘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요나는 이 물고기 뱃속을 지옥의 또 다른 용어인 스올로 표현한다. 2절에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라고 했다. 요나가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였는데, 그의 절박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는 것이다. 다윗도 이런 상황은 언급한 적이 있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시 69:14)."
 
누구라도 요나처럼 기가 막힌 환경에 처해 있다면 요나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요나는 비록 물고기 뱃속에 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 꼭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었다.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한다. 그리고 믿음의 결단을 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의 회개 기도가 하나님의 분노를 은혜로 바꾸는 능력이 되었다. 은총과 징벌 사이에 깨달음이 중요하다. 자신의 잘못을 빨리 깨닫는 것은 모든 실패를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요, 비결이다. 요나의 고백은 '모든 문제는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요나를 거꾸로 하면 '나요'가 된다. '너요'하면 싸움이 되는데, '나요'하면, 용서가 되고 회복이 된다.
 
영어로 '생각'의 'Think'와 '감사'의 'Thank'는 어원이 같다. 생각을 바르게 깊이 하면, 오해가 이해가 되고, 감사가 된다. 생각이 감사가 될 때 모든 맺힌 문제가 풀린다. 요나가 하나님과 새로운 소통이 시작된 것은 그의 감사기도 때문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고 요나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물고기에게 명령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시한부 인생을 감사할 상황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요나 자신의 마음상태이다. 요나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감사가 하나님과의 소통이 되고, 이후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요 희망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들으시고,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감사소통이 우리의 소통이 되고, 하나님과의 소통이 되어 만사형통이 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언제나 문제는 주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주의 뜻대로 순종하겠사오니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끄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홍무열 목사
/동대천교회


금-오직 한 가지 방법
본문 : 욘 1:8~13
찬송 : 324장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복 3가지가 있다. 빛, 소금, 잠이다. 빛이 없으면 이 세상은 암흑의 세계가 되고 소금이 없으면 지구 전체가 부패하여 썩게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 잠이 없으면 지쳐 죽게 된다. 잠이란 히브리어로 '야센' 즉 '휴식'이라는 뜻이다. 잠은 인간의 행동을 제어해주고 악한 행동을 자제하게 한다. 고모라 사람들과 소돔 사람들은 타락한 생활을 위해서 잠자는 것을 억제했다고 한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도 신선한 공기를 주입해서 잠을 자지 않고 며칠간이나 도박을 하도록 한다.
 
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단잠과 단순한 생리적인 잠이 있다. 요나는 지금 살기 위해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지쳐서 생리적인 잠을 자고 있다. 뱃사람들이 폭풍을 피해 보려고 방향을 틀어보지만 폭풍우는 점점 심해진다. 이유는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를 불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시련이 온다 해도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지금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른 길을 찾을수록 사태는 점점 나빠진다.

잠에서 깨어난 요나가 배 위에 올라와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 내가 아노라." 자기 고집, 교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요나는 진정한 선지자이다. '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사람이 있다면 그 가정과 교회는 미래가 있다.

선원들이 요나에게 4가지 질문을 한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나라가 어디냐? 어느 민족 사람이냐?" 요나는 대답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라." 이 말은 '에벨'이라는 히브리어로 '나는 선민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 즉 '강을 건너온 자'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다시 말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요나는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즉시 폭풍우가 멈췄다. 요나의 '나 때문이오'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가 살았다. 어떤 위기의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것은 나 때문이오'라고 말한다면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있다.

수없이 실패한 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탓으로,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고 환경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늘의 기도
 
우리는 언제나 남을 원망하며 많은 변명을 하고 살아갑니다.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 혹은 방법을 몰라서입니다. 이제 거룩한 용기를 주셔서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고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용숙 목사
/보성교회


토-풍랑의 정체
본문 : 마 14:22~33
찬송 : 371장

오늘 본문 말씀은 네 가지 정체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첫째, 바다의 정체이다. 본문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여기서 바다는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그러면 배는 무엇인가? 인생의 바다에서 안전하려면 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배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들이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에게 안락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들이 배다. 건강, 재물, 권력, 또는 자녀가 배일 수 있다. 배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가려는 나를 붙잡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배는 우상숭배이다.
 
배안에는 열두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배를 버리고 예수님께로 간 사람은 오직 베드로 한 사람뿐이다. 베드로의 위대함은 배를 버린 데 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도 왜 다른 제자들은 물위를 걷지 않았을까? 배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를 버리면 죽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배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면 정말 배안에만 있으면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배는 풍랑을 만났다. 인생의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과감히 배를 버리고 예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건강, 재물, 권력, 명예, 자녀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 풍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풍랑은 밤에 일었다. 풍랑은 제자들과 상관없이 일어났다. 특이한 점은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6장 48절을 보면 육지에 남아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힘겹게 풍랑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시고서도 곧바로 가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이 풍랑의 정체가 시험(test)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넷째, 예수님의 정체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쳤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제자들은 이 풍랑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풍랑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이다. 혹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이라는 풍랑을 만났는가? 베드로처럼 배를 버리라.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풍랑 위로 한발자국 내딛으라. 물위를 걷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