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선교사의 첫 걸음

무소속 선교사의 첫 걸음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염신승 선교사
2014년 02월 04일(화) 16:08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한 이래 현재 태국 치앙마이에서 사역 중인 나의 선교사역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학부 1학년 때 '선교사파송연구회'에 가입해 선교사로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고 훗날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나라가 결정되었다. 동기 목사님이 선교하던 남미 볼리비아였다. 총회에 들렸더니 역시 총회 파송 선교사을 받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아직 월급 받고 선교할 만큼 준비가 안 되었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돌이켜보니 참 잘 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같은 대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1990년 4월, 부모님의 도움과 교우들이 십시일반 주신 헌금으로 '무소속 선교사' 가족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아내와 한 살 반 된 쌍둥이 딸, 그리고 나, 모두 네 명이었다. 후원교회도 없고, 무소속이고, 총회 파송도 아니니 교우들의 환송은 당연히 없었다. 일본을 거쳐 뉴욕에 내렸다. 직원이 부른다. '미국 통관비자가 없이 왔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찔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냥 봐 준단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JFK 공항에서 뉴왁공항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짐도 많고 식구가 넷이나 된 걸 보고는 직접 실어다 줬다. 하나님 은혜로 뉴욕 도로 무료 투어를 한 셈이었다. 이후 뉴욕을 출발해 마이애미와 브라질 상파울로, 볼리비아 싼타쿠르스 공항을 거쳐 목적지인 코챠밤바 공항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코챠밤바는 해발 2500m이다보니 숨이 차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땅 끝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집을 구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가장 허름한 집, 그래도 주인이 사는 멋진 집의 뒷채를 얻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넘쳤고, 모기는 기본이고 싱크대 서랍엔 쥐가 새끼를 낳았다. 언어공부가 급했다. 선교사 언어학교는 비싸서 못가니 기도하며 방법을 찾는데 해법이 생겼다. 오전에 사립 초등학교, 오후엔 공립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선 꼬마들이랑 놀고, 숙제도 하고, 똑같이 시험도 봤다. 체육시간에 같이 운동도 하고 춤을 출 때면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재미있게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나중엔 대학교 청강을 하고 정식학생이 되기도 했다. 생존 스페인어에서 생활 스페인어로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던 중 볼리비아 선교사 모임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대상자는 총회파송선교사였다. 그런데 선배님들이 같은 교단 목사이니 와서 인사하라고 하셔서 수도인 라빠스로 가 반가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분위기가 어색한 것이 아닌가. 무소속 선교사가 끼어있었던 게 문제였다. 선배 한 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염 목사는 여기 회원이 아니지" 잠시 나가있으라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그랬다. 나는 총회파송도, 노회파송도 아니고 지정 후원교회도 없으니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이었지만 무척 섭섭했다. 눈물이 핑돌았다. 이제라도 총회파송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처럼 무소속으로 오는 분들이 있다면 잘 돕고 섬겨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무소속 선교사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29살, 아내는 27살. 그리고 기저귀를 찬 쌍둥이 딸과 함께. 후원교회도 없고 총회파송 선교사도 아니었기에 하늘과 가까운 볼리비아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오, 주님!" 

염신승 / 총회 파송 태국 선교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